“국왕 정조, 어느 쪽이 진심이었습니까?”… ‘정조 치세어록’ 펴낸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입력 2011-11-25 17:33
안대회(50)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가장 흥미로운 임금으로 주저 없이 22대 왕 정조(1752∼1800)를 꼽았다. “개인사 드라마와 인간적 매력을 따지면 최고 군주는 역시 정조”라고 했다. 최근 ‘정조 치세어록’(푸르메)을 낸 안 교수를 23일 만났다. 책은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홍재전서’ ‘정조어찰첩’ 등 정조의 말과 글을 담은 수십 종의 사료를 선별해 ‘공부’ ‘인재등용’ 등으로 나눠 정조어록을 정리했다.
-소설로, 영화로, 연구서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정조를 말하는 이유는.
“업적도 대단하지만, 실패한 개혁군주의 이미지가 정조를 더 매력적으로 만든 것 같다. 48세 나이에 원하는 개혁을 완수하지 못한 채 예상보다 일찍 죽었고, 그 뒤 조선은 급격히 몰락하지 않았나. 일제 식민지, 6·25전쟁 등 힘든 역사가 이어졌으니 ‘정조가 10∼20년 더 살아 개혁을 했다면 달라졌을까’ 하는 기대가 투영된 측면이 있다. 할아버지(영조)가 아버지(사도세자)를 죽인 비극적 개인사를 딛고 왕이 됐다는 개인 스토리도 있고.”
-연구자 안대회를 매료시킨 매력이라면.
“정조에게는 정치인으로서의 금도(襟度)가 보인다. 정조도 반역자를 사형시키고 반대파를 귀양 보냈다. 하지만 정치적 보복조차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힘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다. ‘정치인’ 정조는 잔인하지도, 폭압적이지도, 그렇다고 유약하지도 않았다. 힘을 쓰되 도를 넘지 않는 통제력을 갖고 있었다. 성격도 흥미롭다. 급한데다 다혈질이었다. 화도 잘 내고, 다변에 달변이었다. 반면 반성도 빠르고, 잘못 했다고 느끼면 바로 바로잡았다. 한마디로 뒤끝이 없었다.”
-2009년 정적 심환지와 주고받은 비밀어찰(御札·왕의 편지) 6첩, 297통이 발견되면서 노회한 정치인 정조의 모습에 실망했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반대파와의 비밀 대화를 정치적 협잡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커뮤니케이션 노력이라고 평가한다. 정조에게 어찰은 일종의 소셜미디어 같은 거였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이 실시간으로 여야 정치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다. 국가 주요 이슈에 대해 정조는 서찰을 통해 신하들과 끊임없이 의견을 주고받았다.”
-백성과의 대화는 어떤 방식으로 했나.
“왕의 궁궐 밖 행차는 수천 명의 경비부대가 동원되는, 비용이 엄청난 행사다. 정조는 안전을 걱정하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양 시내를 자주 오갔다. ‘백성들에게 내 얼굴을 보여줘야 한다’는 게 정조의 생각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국민과의 대화 같은 거다. 기근에 서북지방 유민이 한양으로 모여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성판윤에게 종로에 유민을 모으라고 명령한 적도 있다. 유민 앞에 직접 나가 ‘다 내 잘못이다’고 말했다. 국왕이 유민에게 ‘잘못했다’고 말하다니 정말 상상 못할 행동이었다. 폭도가 될 뻔한 유민의 마음을 국왕의 말 한마디가 다독인 거다. 시전 상인들과도 대화했고, 갈수 없는 먼 곳에는 포고령을 내려 보냈다. 특이한 건 대부분 한글 번역본을 함께 보냈다는 거다. 한문, 언문 이렇게 두 개. 자기 말을 많은 백성에게 전하도록 노력했다는 건데, 어찌 보면 상당히 근대적인 제스처다. 자신감이기도 하고.”
-‘정조 치세어록’에 나타나는 정조의 언어는 어떻게 평가하나.
“정조는 정치적 수사에 능했고, 언어감각도 놀라웠다. ‘백성이 배고프면 나도 배고프고 백성이 배부르면 나도 배부르다’라고 한다든지, 도둑을 처벌해야 한다는 말에 ‘도둑도 내 백성’이라거나, ‘나를 반대하는 신하도 내 신하’라고 말하는 대목은 놀랍다. 개인 선박 때문에 세곡 운영에 차질이 빚어져 조운선(국가 소유의 배)을 운영하자는 목소리가 나온 적이 있었다. 정조는 ‘국가에 이득이 되더라도 백성의 생계를 빼앗으면 안 된다’며 반대했다. 사학(邪學)을 막을 법을 만들자는 목소리에 ‘불순한 학문이라도 법으로 막지 못한다’고 답했고, 소설을 읽으라는 말에는 ‘서류가 소설보다 재밌다’고 되받아쳤다. 정적에게는 ‘네 주장을 무디게 만들지 마라. 각을 세워 부딪치라’고 주문했다. 문제를 감추지 말고 부딪쳐 해결하라는 말이다. 표어나 속담 같은 것도 자주 썼다. 왕의 언변에 신하들이 넘어갔던 것 같다(웃음).”
-그게 통치력으로 이어진 건가.
“18세기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의 모순은 곪을 대로 곪은 상태였다. 정치적 알력, 종교적 갈등, 지역갈등 다 심했다. 민란도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정치력을 발휘해 갈등을 다독였고, 문제가 불거지면 희생을 최소화시키는 선에서 통합을 이뤄냈다. 이런 타협과 조정의 태도는 지금 정치가 모델로 삼을만하다.”
-개혁군주라는 정조의 이미지는 실체가 있는 건가.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다. 중인이나 서얼, 평민에 애정을 표했을 뿐 아니라 지역적으로 소외받은 이들도 배려했다. 함경도, 제주도 같은 소외지역에서 과거를 치른 것이 증거다. 제주도민이 고생한다는 얘기에 전복 진상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노론 이외의 당파를 적극적으로 등용한 유일한 왕. 그럴 힘과 의지가 있었던 임금이 정조였다.”
-20여년 정조 시대를 연구해온 학자로서, 정조에게 한 가지를 묻는다면.
“정조는 평생 주자학을 공부했고, 주자학을 조선 사회의 근간으로 삼고자 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그렇다. 하지만 그게 진심이었는지는 의심스럽다. 혹시 보수 세력을 다독이기 위해 주자학을 명분으로 내세운 건 아닌지. 정조는 주자학에 입각해 고문(古文)을 옹호하고 소품체를 비판하면서 문체반정을 시도했다. 하지만 소품체를 쓴 학자들에 대한 처벌은 대단하지 않았다. 박지원 이덕무 이가환 박제가 같은 학자들을 보라. 나중에 다 중용됐다. 상호모순된 행동도 했다. 최근 공개된 편지를 보면 정조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궁으로 보내라’고 한 대목이 나온다. ‘열하일기’의 문체를 문제 삼아 연암에게 반성문을 쓰라고 했던 게 정조였다. 근데 ‘열하일기’를 읽고 싶으니 보내달라고 했다. 반성문을 쓰라고 한 정조, 책을 보내달라는 정조. 어느 쪽이 진심인지 궁금하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