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충동 벗어난 문자들 향연… 신예작가 정용준의 첫 소설집 ‘가나’
입력 2011-11-25 17:35
지난해 신설된 ‘웹진문지(webzine.moonji.com)문학상’은 각 문예지에 발표된 등단 7년 차 이하 작가들의 중단편을 대상으로 매달 첫 주에 ‘이달의 소설’을 뽑고 이 중에서 매년 2월 최종 수상작을 가리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상이다. 현 상황에서 한국 소설의 최대치를 뽑아내자는 목표 아래 1년 내내 심사 과정과 내용이 중계된다는 점에서 작가들은 진검 승부를 펼칠 수밖에 없다.
2009년 등단해 막 걸음마를 뗀 신예 작가 정용준(30)은 단편 ‘가나’로 2010년 3월 제1회 웹진문지 ‘이달의 소설’에 선정된 주인공이다. 진검 승부에서 당당히 고수 반열에 오른 그가 첫 소설집 ‘가나’(문학과지성사)를 냈다.
“지금 내가 잠을 자는 것인가, 꿈을 꾸는 것인가, 아니면, 죽은 것인가. 그렇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죽은 것이다. 죽음은 잠처럼 익숙하게, 하지만 예상할 수 없게 찾아왔다. 어, 하는 그 사이에, 나는 죽었다.”(45쪽)
‘가나’의 화자는 이미 죽어 시신이 된 ‘나’이다. ‘신원 미상, 아랍계 외국인 노동자로 추정’이라는 몇 개의 단어가 ‘나’에 대한 유일한 단서일 뿐이다. 익사한 ‘나’는 물속을 유랑하며 그리운 고향을 가고 있다. 먼 이국에 와서 외국인노동자 신세가 돼 고기잡이 원양어선을 탄 사내. 그는 죽어서야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을 부른다. “하비바, 언제나 대답이 없던 당신은 여전히 대답이 없다. 문 앞에 서 있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들고 있던 술잔을 벽에 던져버렸다. 나이가 조금 어리다고만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자가 아닌 아이였다. 게다가 들을 줄만 알고 말은 못하는 벙어리였다.”(47쪽)
바닷길로 국경을 여러 번 넘어 정박한 어느 항구에서 술에 취해 바다에 빠진 ‘나’는 스크루에 몸이 부딪혀 목숨을 잃은 뒤 이제 해경에 의해 건져진 채 방수포에 덮인 시신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 ‘가나’는 이승에서 못다 부른 사랑의 노래로 변주된다.
정용준 소설 속 인물들은 이처럼 죽음에 경도되는가 하면 폭력적이고 파괴적이기까지 하다. 망상증 환자가 동물원에서 보았던 검은 표범에게 도착(倒錯)된 나머지 맹수처럼 네 발로 기고 피부에 검정색 물감을 바르는 이야기(‘먹이’)와 뜻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된 어린 엄마를 위해 뱃속의 태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야기(‘사랑해서 그랬습니다’)가 그렇다.
‘떠떠떠, 떠’에는 가혹한 교사 때문에 실어증을 앓는 학생 ‘나’가 등장한다. “떠, 떠, 떠, 떠, 떠, 어……, 뜨, 뜨…… 읽으려 했다. 어떻게든 읽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읽어지지 않았다. 울어도, 고개를 숙여도, 비참하게 여전히 떠, 떠, 떠 더듬어도 선생은 주름진 눈꺼풀조차 까딱하지 않았다. 기어이 내게 책을 읽히는 것이 자신의 위대한 교육적 사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선생의 태도는 완고했다.”(15쪽)
‘나’의 소원은 상상 속에서나마 가혹한 교사의 목에 연필을 박는 것이다. 이렇듯 정용준의 소설엔 죽음에의 충동과 폭력에의 충동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 충동은 머릿속에서만 발동하는 추상화된 복수다. 실제로 파괴나 폭력에 이르지 않고 자제되고 통제되는 지점에서 오히려 자기애가 싹튼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신예 소설가의 글쓰기를 추동하는 에너지일 것이다. 조선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을 마친 정용준은 본격적인 글쓰기를 위해 서울로 거처를 옮길 예정이다.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정용준 소설은 장용학, 손창섭, 남정현, 박상륭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 소설의 아주 어두운 계보의 맨 끝자리이자 맨 앞자리에 놓인다”며 “한국문학사를 통틀어 이토록 아름다운 죽음의 문장들을 만나게 되는 일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