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미대 나온 경찰이야”… 몽타주 ‘타짜’의 기술
입력 2011-11-24 18:22
키 175㎝, 몸무게 104㎏, 팔뚝 둘레 54㎝. 큰 덩치에 별명마저 ‘조폭’이랬다. 눈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눈빛만으로 상대에게 제압당하기는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는 한때 강력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형사다. 흉기를 휘두르는 용의자를 맨손으로 검거해 ‘격투의 달인’으로도 통했던 남자. 국내 유일 미대 출신 몽타주 요원 정창길(49) 수사관이다. 지난 22일 정 수사관을 만나러 대전 둔산동 대전지방경찰청 3층 과학수사계 몽타주실을 찾아갔다. 방 안에 들어서니 한 쪽 벽면은 몽타주로, 다른 벽면은 경찰청장 캐리커처를 비롯한 각종 그림으로 도배돼 있었다.
정 수사관은 몽타주를 전담한 지 올해로 5년째다. 대전중부경찰서 강력계 형사로 현장을 누비다 ‘화가 경찰’이란 소문이 나면서 2007년 여름 대전지방경찰청 몽타주 요원으로 발탁됐다. 7개월여간의 ‘수습’기간을 거쳐 2008년 3월 ‘데뷔작’으로 내놓은 게 대전 연쇄방화범의 몽타주였다. 몽타주가 배포되고 나흘 만에 범인이 검거됐다. 40대 무직자로 인상착의가 남달랐던 범인. 유행 지난 바가지머리에 퉁퉁한 얼굴, 두 개로 접힌 턱. 범인 본인도 놀랄 정도로 몽타주는 실물에 가까웠다. 그때부터 지금껏 정 수사관이 그린 몽타주는 총 100여점. 그의 몽타주는 워낙 실물과 닮아서 관내에서 화제가 됐다.
명색이 화가다. 목원대 미대를 나와 한국미술협회와 대전구상작가협회 회원으로 20여 년 활동해왔다. 1992년 ‘밥벌이’를 위해 경찰에 입문한 뒤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95년 개인전을 연 것을 시작으로 각종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했고 작은 화실도 열었다.
“강력계 형사 시절에도 ‘내가 그리면 더 잘 그릴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막연하게 했죠.”
막상 실전에 들어가 보니 만만치 않았다. 몽타주 그리기는 다른 차원의 수사였다. 피해자나 목격자와의 ‘라포(rapport·심리학에서 쓰이는 프랑스 용어로 공감을 뜻한다)’를 형성하는 일은 기본이고, 필요하다면 최면수사도 활용해야 했다. “그림 실력이 다가 아니에요. 피해자나 목격자의 기억과 잔상을 최대한 끌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몽타주 수사’라고 하는 거지요.”
차라리 현장에서 용의자를 붙잡는 일이 낫겠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몽타주 작성까지 짧게는 6∼7시간, 길게는 사나흘도 걸렸다. “겨우 다 그렸는데 ‘이렇게 안 생겼는데요’라고 해봐요. 환장하는 거지요.”
몽타주 작업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요즘 범인들의 얼굴 유형과 스타일 등을 과거의 데이터베이스(DB)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재 요원들이 사용하는 ‘한국형 몽타주 프로그램’에는 얼굴형, 두발 모양, 피부색, 주름, 수염, 점, 상처 등에 따라 각기 다른 총 1만1000여개의 유형이 저장돼 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은 1998년 개발된 것이다. 해당 정보를 조합해 컴퓨터상에서 범인의 얼굴을 완성해내는 게 몽타주 작업인데, 과거 DB는 이제 거의 활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머리 모양은 유행 따라 수시로 변화하는 데다 성형, 서구화된 식생활 등으로 얼굴 형태가 많이 달라졌죠.”
실제로 그가 지난 1년간 그린 몽타주들을 DB에 있는 유형들과 대조해봤다. DB만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몽타주는 10개 중 1개에 불과했다. 그가 자신만의 DB를 따로 만드는 이유다. “연예인 사진부터 인터넷에 나도는 일반인 사진 등 자료가 될 만한 것들을 계속 모으고 있습니다.”
몽타주가 잘 나오는 얼굴은 개성이 강한 얼굴이다. 눈이 유독 찢어졌다거나, 헤어스타일이 독특하다거나, 주걱턱이 도드라지는 등 특징이 있어야 한다. 생긴 게 밋밋하면 몽타주를 만들기도 힘들고, 검거하기도 쉽지 않다. “저처럼 몽타주가 잘 나오는 얼굴이면 작업하기 쉽죠. 그런데 밋밋한 얼굴이 의외로 많아요.”
몽타주 수요도 줄고 있다. CCTV 보급이 늘었기 때문. 정 수사관의 한 달 평균 작업 건수는 2∼3건. 경찰백서에 따르면 몽타주 작성 건수는 2008년 351건에서 2009년 291건으로 크게 감소했다. 작업이 없을 때 몽타주 요원들은 현장 감식 등 다른 업무에 투입된다. 그러나 몽타주는 사라질 수 없는 수사기법이다. CCTV 사각지대에서 범죄가 발생했거나, CCTV 기록이 훼손됐을 때 몽타주는 반드시 필요하다.
몽타주 요원 교육 강의도 종종 나간다는 정 수사관. 그에게 ‘미션’으로 본보 모 기자의 몽타주 작성을 의뢰해봤다. 그는 먼저 각종 얼굴형이 담긴 스크랩북을 기자에게 펼쳐 보였다. “찬찬히 보세요.” 동그란형, 각진형, 역삼각형, 갸름한형 등으로 유형이 나뉘어 있었다. 각진형 중 각이 덜 진 얼굴 하나를 골랐다. 그는 몽타주 프로그램을 열어 해당 얼굴형을 중앙에 넣었다.
다음 단계는 두발. 아무리 봐도 대상의 두발 모양을 프로그램에서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대충 고르면 나중에 손을 보겠다고 말했다. 대충 골랐다. 다음으로 몽타주의 ‘생명’인 눈. 쌍꺼풀이 진 큰 눈을 찾아봤다. “더 동그랗고 맑은 눈은 없나요?” 적합한 눈을 역시 찾을 수 없었다. 코도 마찬가지. 그는 DB에 없다면 최소 6시간이 필요하다고 발했다. “그럼 대상을 바꿀게요!” 기자는 6시간이나 기다리긴 곤란해 편의상 몽타주 대상을 바꿨다. 프로그램에 있는 유형에서 눈과 코, 턱선 만 다듬으면 될 것 같았다.
기자: “눈매를 좀 더 올려주시고요. 콧구멍은 조금 더 넓게, 콧망울은 두툼하게.”
수사관: “이렇게요?” 그는 마우스로 커서를 바쁘게 옮겼다.
기자: “코 길이가 좀 긴데. 더 짧게.”
수십 차례 마우스 버튼을 클릭하던 수사관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못생겼네.” 기자는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마지막 수정 작업에 박차를 가해달라고 요청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몽타주 수사요원들은 눈이 작으면 코가 길고(북방형), 눈이 크면 코가 짧은(남방형) 얼굴에 익숙해 있었다. 반대의 조합(눈이 작고 코도 짧은)에 대해서는 예외로 봤다.
30여분이 경과했다. 마침내 완성된 몽타주. 본보 편집국 한 선배 기자의 얼굴이 보였다. 정 수사관은 “어때요? 닮았나요?”라며 궁금해했다. 닮았다. 미션 완수다.
대전=글·사진 이경선 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