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박병권] 도덕 상실의 시대

입력 2011-11-24 21:54


6·25 전쟁의 폐허 위에서 허리띠를 졸라매 선진국 대열에 오른 우리나라처럼 역동적인 사회도 없다.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의 간단없는 노력으로 군부독재의 사슬을 끊어 문민정부를 탄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던 우리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국회 비준동의안 통과로 통상대국으로 가는 디딤돌을 성공적으로 놓았다.

외양적인 경제성장에 맞물려 타인에 대한 배려도 늘어 봉사와 기부문화가 점차 자리잡아가고 있다. 장애인 인권보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시각도 많이 달라졌다. 독특한 성향의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이들을 보호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에 도달했다.

역동성있는 대한민국 사회

그렇지만 아직도 공직자 부패, 학교 폭력, 미성년 성폭력, 무너진 질서 의식 등 사회 곳곳에는 어두운 구석이 적지 않다. 최근 전남의 한 마을에서 불거진 동네주민들에 의한 장애여성 집단성폭행 사건은 단적인 예다. 여중생이 성인이 될 때까지 지적장애 2등급인 여성을 희롱한 어른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최소한의 양심만 있었더라도 지인의 어린 딸을 그렇게 농락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가해자들이 모두 피해자의 집에서 학교까지의 길가에 사는 어른들로 서로 범행의 정보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이다. 피해자의 부모는 이런 사실을 새까맣게 모른 채 긴 세월을 이들과 인사를 하며 지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보살펴줘야 할 장애인을 상대로 범행을 저지르고도 뻔뻔스럽게 그 부모와 인사를 주고받다니 인간의 양심을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경우 단순히 성폭행범으로 처벌하는 것 이외에도 다른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고도 도움을 주지 않을 경우 처벌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미국과 유럽에는 존재한다. 이 사건처럼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동일인에 의해 반복적으로 범행이 이뤄져 가해자끼리도 서로의 범행을 알았을 경우 더할 나위 없이 적용하기 좋은 법이다. 다만 양심의 문제를 법규에 담는다는 점과 형법상 부작위(不作爲)가 범죄가 되려면 법률적 의무가 있어야 한다는 규정과 상충되기 때문에 입법화가 쉽지 않다는 문제가 있긴 하다.

우리와 달리 중국 광둥(廣東)성에서는 두 살 배기 여자아이가 뺑소니 차량에 치였는데도 행인들이 방치해 숨지자 이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일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중국처럼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심해져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일이 상습화되면 이 법의 필요성이 제기될 것이다. 요즘 들어 독거노인이 숨졌는데도 이 사실이 알려지기까지 상당기일이 걸릴 정도로 이웃의 일이 자신의 관심에서 벗어나는 일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성장하면서 무관심 심해져

횡단보도가 있는 사거리에 교통사고 목격자를 찾는다는 플래카드가 심심찮게 붙어있는 모습은 우리들이 타인의 삶에 무관심하다는 방증일 것이다. 심야는 물론이고 대낮에도 교통경찰관만 없으면 신호를 무시하는 운전자의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다. 빨간 신호에는 반드시 기다렸다 출발하는 일본 사람들의 운전습관에 감동했던 기억이 새롭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도덕성 상실은 급속한 경제성장 과정에서 깨끗한 부를 축적한 사람이 드물고, 바쁘게 살다 보니 타인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으며,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불법과 탈법에 둔감했던 과거가 현실화 된 것이리라. 이제 도덕성 회복과 함께 더불어 사는 방법을 배워 약자를 진정으로 배려하는 사회를 만들도록 하자.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품위 있는 선진국으로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