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선교100년(12)-중국인을 감동시킨 한인선교사들

입력 2011-11-24 16:52


[미션라이프] 중국 산둥(山東)성에 파송된 조선 선교사에 대해 현지 교회의 반응은 어떻게 변해갔을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1913년 처음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 중국교회와 교섭했을 당시엔 중국 측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반대 목소리가 나오기까지 했다. 중국 입장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지 30년도 안 된 조선, 그것도 일제 강점기의 교회가 타민족 선교를 한다는 게 가능하다고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중재로 이 문제가 풀리면서 선교사 파송과 함께 활동할 지역이 확정됐다. 이후 초기 선교사들이 흘린 희생의 땀방울은 교회 개척과 더불어 선교지를 더욱 확장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취재팀이 산둥성 곳곳에서 확인한 것은 선교사들이 뿌린 씨앗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직접 세운 모든 교회를 찾아낼 수는 없었지만 선교사들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등 본국에 보고한 내용 어느 것 하나도 미화된 게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홍승한 방효원 목사 등이 돌봤던 자오거좡(趙格庄)과 서워보(蛇窩泊) 등을 방문하면서 이를 더욱 확신하게 됐다.

중국교회 지도자들을 감동시킨 조선선교사들

1917년 가을 선교지에 부임한 홍승한 방효원 목사가 중화기독교회 산둥노회에 참석해 노회원들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노회원들은 “조선교회를 본받아 전도를 잘해야 되겠다”면서 선교사들을 깊이 신뢰했다(1918년 9월 4일 길선주 목사의 ‘중화민국 산둥성 라이양성 전도형편’). 산둥노회는 미국 선교사, 중국인 목사와 장로, 조선 선교사 등 3개국 회원으로 구성됐다.

1918년 11월 7일 덩저우부(登州府)에서 열린 산둥노회에 홍승한 방효원 목사가 참석, 라이양(萊陽)교회 형편에 대해 보고하자 노회원들은 조선 선교사들의 능력에 대해 감탄했다. 1919년 2월 5일자 ‘기독신보’에 실린 홍승한 목사의 편지에 따르면 “(두 선교사의 보고를) 국내외 일반회원이 재미있게 듣고 우리 노회 내 모든 교회가 라이양교회처럼 되자”고 결의했다. 노회원들은 라이양교회를 시찰하는가하면 조선 선교사들의 선교지를 라이양 사방 30리로 제한한 걸 아쉽게 여겼다.

현지 교회지도자들이 조선선교사들에게 좋은 인상을 갖게 된 것은 조선예수교장로회의 태도가 한 몫 했다. 현지교회를 존중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만들어간 것, 뿐만 아니라 선교사를 파송한 조선교회에 대해서도 이미지가 좋았다. 즉, 조선교회에 대한 좋은 소문이 선교사들에 대한 호감도 이어진 것이다. 1920년에 발간된 ‘중화민국 산둥성 라이양선교사 방효원씨 보고’에 따르면 조선교회가 신령하고 왕성할 뿐 아니라 자립한다는 소문이 퍼져있었다. 아울러 주님의 뜻을 준행한다는 명성이 중국 내 목사, 장로, 집사 등에게 자자했다. 신령한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의 가르침과 인도함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홍승한 방효원 목사 사역에 1918년 11월 19일 박상순 목사와 의사 김윤식이 합류했다. 이들은 11월 4일 평양을 떠나 그달 11일 옌타이(煙臺)에 도착하고 8일 뒤 라이양에 도착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1명의 목사 선교사를 더 보낸 것은 본래 선교지에 선교사 3명이 일하였으므로 1명을 더 보내달라는 현지 선교사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191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7회 회의록. 68∼77쪽). 김윤식 의사가 중국에 가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대구에서 (나는) 계성학교에 있고 목사님(박상순)은 제일교회 위임목사로 계실 때 자신(박상순 목사)은 중국 라이양 선교사로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하던 중 (나의) 부친께서 사회인보다 선교사 있는 곳으로 가서 사업함을 원해 결국 산둥 라이양으로 갔다.”(1958년 9월 ‘김윤식의사자필초고’)

1918년 12월 4일 라이양에서 계림의원을 설립한 김윤식 의사는 해외의료선교의 선구자였다. 신학교를 나오고 안수 받은 목사만이 선교사로 인정을 받던 시절, 그의 헌신은 이른바 자비량 선교의 모델이 된 것이다. 산둥노회원이던 홍승한 목사는 1920년부터 박상순 목사와 함께 자오둥(膠東)노회원으로 활동하게 됐다. 자오둥노회는 1917년 성립된 노회로 칭다오(靑島) 지모(卽墨) 핑두(平度) 등을 포함했다.

조선선교사회 조직과 선교사자녀학교 결성

산둥성 선교가 활성화되면서 조선선교사회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선교사 파송 규칙을 준비하면서 마침내 1919년 조선선교사회를 조직했다. 조선선교사회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로 조직하되 회장 1인, 서기 1인, 회계 1인을 선정해 매월 1회 정기회를 개최하고 일반사무를 처리케 했다. 일반 의결사항 기록뿐 아니라 매년 회계 보고, 선교회에서 1년 내 해야 할 일, 목사와 사모 개인이 감당해야 할 일, 이듬해 비용에 관한 예산 작성과 본국 총회 전도국 보고 등을 했다. 조선선교사회의 주요 안건들은 본국 총회에 일일이 보고됐고 총회의 허락을 받은 뒤에야 중국 측 노회의 허락을 받는 과정을 거쳤다.

1919년 10월부터 1922년 8월까지 조선선교사회는 이와 같았다. 홍승한 목사는 3년 동안 서기를 맡아 선교사회 회의록 기록과 보고 업무를 담당했다. 홍 목사의 신학교 후배인 방효원 목사는 1919년 10월부터 1920년 9월까지, 박상순 목사는 1920년 10월부터 1921년 8월까지 선교사회 회장을 맡았다. 1920년 방효원 목사가 첫 안식년을 보내자 박상순 목사가 회계도 맡았다. 1921년 9월부터 1922년 8월까지 방효원 목사가 선교사회 회장과 회계를 동시에 맡기도 했다.

김윤식 의사는 선교사회에 언권위원으로 참여했다. 1922년 9월 1일부터 조선선교사회는 선교지역이 확장되면서 ‘총선교회’와 2개의 ‘지선교회’를 운영했다. 처음 조직한 라이양선교회 회장은 방효원 목사, 서기 겸 회계는 박상순 목사이었다. 지모선교회 회장과 회계는 홍승한 목사, 서기는 이대영 목사이었다. 이대영 목사는 1921년 9월 평양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0회 총회에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총선교회는 회장 박상순 목사, 서기 이대영 목사이었다. 선교지역이 넓어지면서 라이양에만 거주하던 게 두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선교회 역시 나뉜 것이다.

한편 1915년 김영훈 선교사가 자녀교육 방침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지만 마땅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1919년 1월 선교사 아동학교를 설립했다. 최초의 선교사 자녀학교 교장은 박상순 목사, 교원은 김윤식 의사의 부인 박희복씨가 맡았다. 그해 3월 중국인소학교를 설립, 박상순 목사가 교장을 맡았다. 방지일 목사에 따르면 박상순 목사는 교육자적 기질이 남달랐다. 아울러 선교사들 가운데 중국어 실력도 제일 뛰어났으며 조직을 만드는데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1919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회 총회 회의록에 따르면 박희복씨는 조선 선교사의 아기들을 자기 집에 모아 가르쳤다. 박씨는 숭의여중 3회 졸업생으로 대구 신명여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한 경험이 있었기에 선교사 자녀들을 가르치기에 적격이었다. 그러나 박씨는 교실과 교사가 마땅치 않아 학교를 계속하지는 못했다. 1920년에는 선교사자녀가 12명에 달했다. 방효원 목사는 선교사로서 난감한 사항 4가지를 언급하면서 자녀교육을 그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그만큼 녹록치 않은 게 자녀교육이라는 것이다. 1922년 선교사 아동학교 교원으로 조소임, 리영애, 편순남 씨가 합류하면서 선교사들의 고민이 해소될 기미가 보였다. 성장한 선교사 자녀들은 조선 또는 중국, 일본 등지에서 계속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라이양·지모·서워보=글 함태경 기자 김교철 기자, 사진 이동희 기자

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