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10만 양병론’ 조작이라고?… 국사학계 소리 없는 전쟁
입력 2011-11-24 18:23
“이 짤막한 잘못된 기록이 무려 400여년 동안이나 진짜인 것처럼 회자되면서 유성룡은 판단력 부족으로 국란을 자초한 사람으로 폄하되었고,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에는 ‘유비무환’이라는 구호로 변질되면서 정권을 연장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치를 한다는 지도층 인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공부깨나 한 사람들도 그 허상을 ‘실상’으로 믿으면서 아는 척하고 나대는 통에 공부가 깊지 않은 사람들은 당연히 중병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신봉승(78) 추계예대 석좌교수가 최근 출간한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크게 탄식한 대목이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자 대하소설 ‘조선왕조 500년’(전 48권)을 비롯해 숱한 베스트셀러 역사서를 낸 노학자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통탄한 것일까.
신 교수가 ‘이 짤막한 잘못된 기록’이라고 지칭한 것은 바로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1536∼1584)가 주창한 것으로 알려진 ‘10만 양병론’에 관한 것이다. 율곡이 임진왜란 10년 전부터 대규모 군사를 양성해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는 10만 양병론은 한때 초중고 교과서에도 실렸던 ‘국민 상식’에 속한다.
신 교수는 그러나 이를 허무맹랑한 엉터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확실한 출전도 없이 선조 임금 때 떠돌던 소문이 언젠가부터 정사(正史)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2009년에 낸 저서 ‘정쟁’, ‘조선도 몰랐던 조선’을 비롯해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이 같은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10만 양병론 조작설’을 제기하는 학자들은 한두 명이 아니다. 신 교수 이전부터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등이 강력하게 문제 제기를 해왔다.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대중 역사서를 살펴보면 다양한 저자들이 같은 주장을 펴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에 대비하지 못한 조선왕조의 무능을 지적할 때마다 단골로 거론되는 ‘국민 상식’이 완전히 잘못돼 있다는 것인가? 10만 양병론을 둘러싸고 역사학계는 소리 없는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그 논쟁의 내막을 들여다봤다.
10만 양병론의 출발점, ‘율곡행장’
사실 율곡 본인이 남긴 기록에는 없다. 율곡이 생전에 쓴 각종 상소문과 서간, 문집 등에 10만 양병론을 직접 거론한 대목이 없다는 얘기다. 다만 율곡 주변 인물과 후대인들이 쓴 여러 문헌에 등장한다. 그 첫 진원지가 율곡이 죽은 뒤 그의 제자 김장생(1548∼1631)이 쓴 ‘율곡행장(栗谷行狀)’이다. 행장이란 죽은 사람의 친구나 제자 등이 고인의 생전 언행 등을 기록한 간략한 전기를 말하는데, 여기에서 김장생은 이렇게 서술했다.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청하기를 ‘10만의 군병을 미리 길러 완급에 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지나지 않아 장차 토붕와해(土崩瓦解: 흙이 붕괴되고 기와가 깨진다)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정승 유성룡이 말하기를 ‘사변이 없는데도 군병을 기르는 것은 화근을 기르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밖에 나와서 성룡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형세가 몹시 위태로운데 (중략) 그대 또한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임진왜란을 맞은 후에 유 정승이 조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제 와서 보니 이문정(李文靜)은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하였다.”
율곡이 우찬성 자리에 있던 시기에 선조(1552∼1608) 임금과 함께 국사를 논하는 경연 자리에서 10만 대군을 준비할 것을 역설했는데, 선조는 대답이 없고 당시 부제학 유성룡은 강하게 반대해 무산됐다는 요지다. 임진왜란이 터진 뒤 유성룡이 뒤늦게 후회하면서 언급했다는 ‘이문정은 참으로 성인이다’는 중국 고사성어에서 따왔다. 중국 송나라 시대 명재상인 문정공(文靜公) 이항(李沆)의 선견지명에 얽힌 고사를 인용해 죽은 율곡을 추앙한 것이다.
이후에 나온 10만 양병론에 관한 대부분의 기록은 이 행장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이정구(1564∼1635)가 쓴 ‘율곡시장’, 이항복(1556∼1618)이 쓴 ‘율곡신도비명’, 이긍익(1736∼1806)이 저술한 ‘연려실기술’ 등의 내용이 그렇다. 행장보다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 문헌은 송시열(1607∼1689)이 편찬한 ‘율곡연보’다. 조선후기 사상계를 좌지우지했던 송시열은 행장에 막연하게 적혀있던 율곡의 발언 시기를 ‘계미년(1583년) 4월’이라고 특정했으며, 율곡이 “미리 10만의 군병을 길러 도성에 2만명, 각 도에 1만명씩을 비치하소서”라고 건의했다고 기록했다.
이 같은 사료를 토대로 사학계에서는 10만 양병론을 정설로 자리매김한 한국사 관련 책을 숱하게 쏟아내 왔다. 가령, 인권운동가이자 사상가였던 고(故) 함석헌은 해방 전후에 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임진왜란을 다루며 “나라를 위한 큰 계획 없는 이 백성에게 국방이 어디 있으리오.…그렇게 아는 사람(율곡)의 눈에는 환난의 날이 밝게 보였건만, 아직 무사한 것만 좋아하고 당파 싸움에만 열중하는 사람들의 귀에는 그것은 다 빈말로만 들렸다”고 10만 양병론이 무산된 것을 개탄했다.
청소년과 국사입문자들이 많이 읽는 스테디셀러로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다시 찾는 우리 역사’와 이현희 전 성신여대 명예교수가 쓴 ‘이야기 한국사’ 역시 10만 양병론을 기정사실로 기술하고 있다. 이 밖에 ‘한국사 이야기-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이이화)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전국역사교사모임) ‘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이한우) ‘왕의 남자들’(신동준)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신병주) ‘조선의 힘’(오항녕) ‘인물로 보는 조선사’(김형광) 등에서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완전한 허구이고 날조다”
그러나 10만 양병론 조작설을 주장하는 저서도 시중에 넘쳐난다. 이들의 논지는 대략 이렇다. 첫째, 그렇게 중대한 발언이 율곡 본인의 저서에는 일절 없고 제자들의 기록에서만 나온다.
둘째, 10만 양병론은 선조실록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선조수정실록’에 사관의 논평 형식으로 실려 있을 뿐이다. 선조수정실록은 율곡의 제자들인 서인들이 인조반정을 일으킨 후 선조실록이 북인 편향적이어서 왜곡이 많다며 그 내용을 대폭 수정해 효종(1619∼1659) 때 간행한 것이다(학자들에 따라 두 실록에 대한 신뢰도가 다르다).
셋째, 김장생이 쓴 ‘율곡행장’에는 유성룡이 “이문정(李文靜)은 참으로 성인”이라고 발언한 것으로 나오는데, 송시열이 쓴 ‘율곡연보’ 등에는 “이문성(李文成)은 참으로 성인”으로 나온다. 중국 고사에서 인용한 ‘문정’과 달리, ‘문성’은 율곡 사후 임금이 직접 내려준 시호다. 유성룡이 별세한 시기는 선조 40년(1607)이고,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인조 2년(1624)에 이르러서야 율곡에게 문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따라서 유성룡이 생전에 ‘이문성’ 운운했다는 것은 10만 양병설이 후대에 창작됐다는 결정적 증거다.
넷째, 선조 때 인구는 230여만명으로 추산되는데, 거기서 10만명을 군병으로 조직해 유지한다는 건 당시 인구 구성비로 보나, 국가 예산 규모로 보나 불가능하다.
이 같은 근거를 토대로 조작설을 주장하는 저서로는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2’(이덕일)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이덕일), ‘서애 유성룡 위대한 만남’(송복)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박은봉) ‘이순신은 전사하지 않았다’(남천우) ‘조선 지식인의 위선’(김연수)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이주한) 등이 같은 취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들은 이가원 연세대 교수, 이재호 부산대 교수 등 원로학자들이 1970∼80년대부터 썼던 관련 논문을 기초로 삼고 있다.
조작설의 이면-노론사관과 식민사관
그런데 이런 진위 논쟁의 이면에는 일종의 ‘음모론’이 자리 잡고 있다. 인조반정 이후 집권한 서인(그 중에서도 노론) 세력이 자신들의 대스승인 율곡을 추켜세우고, 아울러 반대파인 동인(그 중에서도 남인)의 거목 유성룡을 깎아내리기 위해 10만 양병론을 조작했다는 시각이다. 그래서 송복 교수는 “율곡 제자들의 의도는 명백하다. 율곡을 성인의 레벨에, 반면 유성룡은 속류(俗流) 정치인으로 떨어뜨리는 데 있음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고 했다.
조작설을 담은 가장 최근 저서에서 김연수는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권력을 장악한 뒤 이이를 높이기 위해 없던 사실을 지어내 선조수정실록 말미에 사관 의견으로 끼워 넣었다는 주장이 유력하다”(‘조선 지식인의 위선’)고 했고, 이주한은 “노론의 문구멍으로 보지 않는다면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고 신랄하게 지적했다.
이에 더해 친일 사학자들의 입김까지 강하게 작용했다는 시각도 있다. 조선 후기 내내 집권세력이었던 노론의 후예들이 일제 시대까지 승승장구하고, 그 일부가 일제 식민사관의 본산인 조선사편수회에서 활약하다 해방 후 국사학계 주류를 장악하면서 10만 양병론이 국민들에게 확산됐다는 것이다. 이덕일 소장 등에 따르면 그 중심에는 국사학계의 태두로 일컬어지는 이병도(1896∼1989) 전 서울대 교수가 있다. 그는 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교에 입학한 이래 식민사관의 대표적 이론가들인 요시다 도우코, 쓰다 소키치, 이미니시 류 등을 사사했고 조선사편수회에서도 활동했다.
이 문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공론화하고 있는 이 소장은 “10만 양병설은 이병도가 자신의 저서 ‘조선사대관’ ‘국사대관’ ‘한국사대관’에 거듭 사실인 것처럼 적어놓았고 그의 제자들이 국사 교과서에까지 실음으로써 전 국민의 상식으로 승격했다”며 “이병도는 자신의 집안 당파인 노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10만 양병설을 사실처럼 믿게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물론 10만 양병론을 진실이라고 믿는 학자들은 이 같은 추론을 억측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역사적 진실 판가름 날 수 있을까
역사학계의 논쟁이 장기간 지속되고 있고, 이에 따라 대중 역사서를 읽는 많은 독자들이 혼란을 느끼는 상황에서 최근 눈길을 끄는 책이 한 권 나왔다. 재야사학자인 김언수(70) 서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 이달 들어 출간한 ‘율곡 10만 양병론의 진실’이다. 오로지 이 주제만 집중적으로 다룬 단행본은 이 책이 처음이다. 그는 고려대 상학과를 나와 조흥은행 지점장 등을 지낸 금융인 출신이지만, 국사학계에서 종종 그런 일이 있듯이 전공자들보다 더 마니아적인 변방의 고수에 속한다. 그가 낸 책은 학파와 상관없이 철저히 사료에 입각해 실증적으로 시시비비를 따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데, 그 결론은 10만 양병론이 분명 실체가 있다는 것이다.
첫째, 10만 양병론이 처음 등장하는 ‘율곡행장’의 작성 시기는 1597년인데, 그때는 임진왜란이 발생한 지 6년째로 정유재란이 시작된 해이며, 율곡이 사망한 지 불과 13년이 지난 시기이다. 이때 유성룡은 권력 2인자인 영의정인 동시에 전국의 장수들을 총괄 지휘하는 도체찰사였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현직 영의정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고 왜란까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일개 호조정랑(지금의 사무관급)이었던 김장생이 “유성룡이 10만 양병을 반대했다”는 허위 문건을 버젓이 지어낸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둘째, 무엇보다 선조 임금이 살아있던 시절인데, 당대의 주군을 끌어들여 그런 위조 기록을 작성하고 공개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셋째, 이정귀가 임금으로부터 율곡의 시호를 받기 위해 쓴 ‘율곡시장’은 광해군 때 지어져 인조에게 올린 것인데, 선조-광해군-인조에 걸쳐 3대의 임금을 우롱하는 거짓 문서가 그 어떤 지적도 받은 바 없이 채택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넷째, 이들 임금 외에 후대의 효종, 숙종, 영조, 정조 등 역대 임금과 주요 신하들이 율곡의 10만 양병론을 유비무환의 상징으로 거론하는 내용이 실록에 숱하게 등장한다. 이병도 교수가 양병론을 저 혼자 느닷없이 꺼내 주장한 게 아니다.
다섯 째, 송시열이 쓴 ‘율곡연보’는 물론 관련 문헌의 원본들을 일일이 찾아 확인한 결과 ‘이문성’이 아닌 ‘이문정’으로 기록돼 있다는 게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하다.
여섯 째, 그 시절 10만 병사를 보유한다는 게 불가능하다고 추론하는데 선조 이전부터, 그리고 선조 이후에도 10만 이상의 군병을 유지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 외에도 10만 양병론의 실체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근거가 있다.
그러나 이 책 한 권으로 국사학계의 오랜 논쟁을 잠재우기는 어렵다. 학자들 각자의 입장 및 학파에 따라 시각이 거의 고정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하고 국민들 사이에서도 많이 회자되는 사안이 언제까지나 중구난방 상태로 방치된다는 건 문제가 있다. 지금도 10만 양병론은 정치·경제·사회 분야에서 매우 다양한 용도로 인용되고 있다. 인터넷에서 ‘10만 양병’을 검색해보면 ‘인터넷 창업자 10만 양병’ ‘보수우파 10만 양병’ ‘문화재지킴이 10만 양병’ ‘강소농 10만 양병’ ‘해커 10만 양병’ ‘주부체험단 10만 양병’ 등 별의별 10만 양병론이 나온다.
국립 사료편찬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라면 이 문제의 진위를 판단하거나 유권해석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편찬위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그 문제는 연구자들 각자의 견해에 맡길 수밖에 없다. 국가기관이 개입해 이렇게 저렇게 판단해야 한다고 하기는 어려운 사안이다”고 밝혔다.
상황이 이러니, 대중 역사서를 좋아하는 국민들은 조선사 관련 책에서 임진왜란 부분을 읽을 때 한 가지는 유념해야 할 것 같다. 집어든 책이 율곡의 10만 양병론에 대해 어떤 견해를 취하든, 그와 정반대되는 견해도 존재하고 있음을.
김호경 기자 hk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