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갑의 먹줄꼭지] ‘나가수’와 베를린 필
입력 2011-11-24 18:21
MBC 인기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의 첫 연출자였던 김영희 프로듀서는 이 프로그램의 기획의도가 “어떻게 하면 이 가수들이 죽을 힘을 다해 노래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 의도가 성공한 건지 출연하는 가수들은 모두 고민되고, 긴장되고, 떨린단다. 그래서 더 준비하고, 더 연습하고, 더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를 한다고 한다.
이 말을 뒤집어 들으면 보통은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물론 이렇게 꼬아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사는 재미가 없어진다. 상황에 따라, 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팬들을 대하는 그들의 기본적인 태도는 항상 최선을 다하는 것일 거라고 믿고 싶다. 그것이 무대 위에 서는 사람들과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연결하는 가장 기본적인 신뢰의 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믿음을 흔드는 일들이 종종 벌어지곤 한다. 2009년에 KBS ‘유희열의 스케치북’이란 프로그램에 미국의 유명 팝가수 머라이어 캐리가 출연해 두 곡의 노래를 불렀다. 모두 립싱크였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시끄러웠다. 이것은 극단적인 사례라고 치더라도 실제로 외국의 ‘이름 있는’ 가수가 한국에 와서 얼마나 ‘죽을힘을 다해’ 노래를 하는지에 대해 나는 그다지 확신이 없다.
몇 년 전 서울에 교환교수로 와 있을 때다. 음반을 통해 즐겨 듣던 한 재즈가수가 ‘내한공연’을 한다기에 보러 갔다가 애꿎은 시계만 보다 돌아온 적이 있다. 그 가수는 처음부터 공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고, 자신이 ‘목을 쓰는’ 시간을 가능한 한 줄이려고 애쓰는 것이 너무 빤히 눈에 띄었다. 그래서 시계를 보며 시간을 재봤다. 한 시간 남짓이었던 그 공연에서 실제로 그 가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15분이 채 안 되었고, 나는 분한 마음을 삭이며 돌아왔다.
아직도 여기저기서 ‘내한공연’이란 표현을 쓴다. 특히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내한공연’이란 타이틀을 단 공연이 더 자주 눈에 띈다.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나 연주자가 한국에 와 공연을 한다고 광고도 떠들썩하게 하고, 그에 걸맞게 티켓 값도 엄청나다.
며칠 전에는 베를린 필하모닉이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했다. 특석이 45만원. 거기서부터 차례로 40만원, 32만원, 21만원으로 내려갔다. 원래 이런 자리는 웬만한 사람들이 쉽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다고 치자. 클래식 팬이 워낙 많아서인지, 또 그 사람들은 다 굉장히 부지런해서인지 가장 싼 5만원, 11만 원짜리 좌석은 예매를 시작하자마자 바로 매진이었다. 표의 가격과 판매 속도로만 보면 우리나라는 클래식 ‘강국’, 클래식 ‘선진국’이어야 한다.
예술에, 음악에 값을 매기자는 얘기는 아니다.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라면 그보다 두 배, 열 배를 더 주고서라도, 또 매표구 앞에서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들어야 할 거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좀 껄끄럽다. 지난 6월 독일 현지에서 같은 곡을 연주한 그들의 공연은 가장 비싼 좌석이 우리 돈으로 12만원 정도였단다. 여기서 서울시향의 연주를 들을 때 내는 그 정도의 값이다. 게다가 이번 공연은 ‘삼성전자와 함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내한공연’이었다니 추가적인 후원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은 ‘3년의 약속, 그들이 다시 온다!’라는 공연 포스터의 문구다. 못 올 곳, 안 올 곳에 오는 걸까?
이 둘을 함께 놓고 보면서 드는 생각은 엉뚱하게도 직장에서 ‘불편한 곳’으로 발령이 나면 받게 되는 ‘격오지(隔奧地) 수당’이다. 수당도 더 받고, 인사고과에 가산점도 더해지고, 생색은 또 생색대로 낼 수 있지만, 그렇게 격오지로 가는 사람들이 부임하자마자 하는 생각은 어떻게 하면 빨리 떠날까 하는 거다. 나를 분하게 했던 그 가수도 공연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바로 도쿄로 날아가 버렸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죽을힘을 다하는 열정과 성의는 찾기 힘들다.
게다가 이런 ‘세계적인’ 오케스트라가 왔을 때, 실제로 우리가 보고 듣게 되는 것은 그들이 카네기홀에서 공연할 때와는 사뭇 다른 경우가 많다. 수석주자들이 빠지기도 하고, 들고 오는 악기들도 다른 경우가 있다니, 보는 것도 듣는 것도 표를 사며 생각했던 것과 같을 수가 없다.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공연들은 대부분 ‘성황리’, ‘절찬리’에 끝난다는 거다. 이 성황과 절찬은 대부분 공연이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완료된다. 공연의 내용보다는 오케스트라의 ‘이름’이 훨씬 더 중요한 것 같은 때가 더 많다.
어떻게 하면 이런 공연에서 그들이 죽을힘을 다해 연주하게 할 수 있을까? ‘나가수’의 가수들이 청중평가단을 무서워하듯, 내한 공연하는 연주자들이 한국의 청중들을 무서워하는 날은 언제쯤 올까? 그 답을 딱히 하나로 집어내기는 힘들겠지만, 그렇게 될 때 우리나라가 문화강국, 문화선진국이 될 것이고 그런 문화강국, 문화선진국은 표 값이나 국민총생산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한공연’이란 말이 갖는 씁쓸한 여운을, 아니 이제 그 말 자체를 없앨 수는 없을까? 이런 바람이 그저 사나운 욕심일 뿐일까?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