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의 문화 게릴라] 청춘의 저항

입력 2011-11-24 18:25


한가하게 영화나 보고, 책을 읽고 있을 때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창밖의 시끄러운 소리가 서재로 넘어 들어와 몰입을 방해한다. 뉴스는 혼란스럽고, 거리는 전쟁터다. 어쩔 수 없이 또 정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라는 전선에서 격렬한 충돌이 있다. 혹자는 하는 것이 옳다고 얘기하고, 다른 누군가는 절대로 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찬찬히 대차대조표를 들여다보며 숫자를 따지기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태도의 문제다. 민주주의란 단지 다수결의 원칙이 아닌, 최선을 찾기 위한 ‘태도’에 있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된다. 아마도 ‘탕탕탕’이라는, 가결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오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마무리되어 역사에 봉인될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영화 한 편이 떠오른다. 몇 년 전 제작된 독일 영화 ‘바더 마인호프’다. 영화는 1968년을 기점으로 한 독일 적군파의 역사를 다룬다. 본격적인 테러리즘으로 변이되기 전, 68세대의 고뇌와 행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냉정한 시선으로 쫓는다. 영화 속 인물들은 그 시대를 살았던 청춘들이다. 그들은 부조리한 사회와 정치에 항거했고, 그 저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테러’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보이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폭력의 역사가 아니다. 무엇이 청춘들을 분노케 했으며 그들을 행동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당시 학생운동조직의 중심이었던 루디 두치케가 저격당하고 적군파 1세대가 감옥에서 죽음을 맞았을 때, 아마도 기성세대는 이들의 저항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격의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며 루디 두치케가 등장해 아무 말 없이 팔을 들어 올리는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무명의 청춘들은 같이 팔을 들어 올린다.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저항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청춘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하나의 사건이 봉인되었다고, 그 시대가 끝나간다고, 부조리에 저항하던 청춘들이 늙어간다고, 잊혀지고 마무리되는 사건 따윈 없다.

아일랜드 출신의 세계적인 록 그룹 U2의 음악 중에 ‘Sunday Bloody Sunday(피의 일요일)’라는 제목의 곡이 있다. 아일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무력진압을 노래한 곡이다. 사건은 역사가 되어 지나갔지만, 이 곡은 U2의 공연장에서 2011년 오늘까지도 울려 퍼진다. 귀족들에 의한 착취에 저항했던 ‘가이 포크스’의 일화 역시 만화와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 담겨 끊임없이 회자된다.

무력진압과 날치기 통과라는, 혹은 어떤 형태로든 기득권의 반민주적 태도가 도를 넘을 때 청춘은 저항했으며 영화와 음악과 문학은 그것을 기록해 왔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가 또다시 벌어지지 않는 한, 홍대 클럽의 밴드들은 자신들의 노랫말에, 만화가들은 풍자와 조롱을 담아 그들의 그림 속에, 어떤 방식으로든 2011년의 어느 날을 기록할 것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음악과 영화 같은 문화에 눈과 귀를 세우고 있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정치가 만들어 주고 있는 셈이다.

<팝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