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태원준] 최루탄 국회… 윈 윈?
입력 2011-11-23 17:35
한나라당 김기현 대변인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22일 논평을 냈다.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최루탄을 터뜨리는 테러를 했다.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엄중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다음날 라디오방송에 출연해선 “형사고발도 검토하겠다”고 했다. 대변인의 말을 듣자면 한나라당은 김선동 의원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며 대단히 미워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민주당 이용섭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한나라당의 비준안 처리를 “야만적 의회 폭거”라고 비난했다. “강행처리한 비준안은 법률적으로 정치적으로 명백히 무효다. 한나라당은 18대 국회 내내 단독상정, 강행처리로 일관했다. 특히 이번 날치기는 어느 때보다 비열하고 부도덕하다.” 그의 말을 듣자면 민주당은 한나라당을 ‘비열한 정당’으로 규탄하며 대단히 미워하고 있다. 하지만 속마음도 그럴까?
23일 아침 기자들 사이에선 “김선동 의원이 한나라당을 살렸다”는 농담이 오갔다. 신문과 방송 뉴스의 큰 비중이 사상 초유의 ‘최루탄 국회’에 실렸다. 조간신문에 일제히 게재된 사진에서 강행처리 총대를 멘 한나라당 정의화 국회 부의장은 최루탄 테러 ‘피해자’로 등장했다. 김 의원이 최루탄을 터뜨리지 않았다면 의장석에서 비준안을 밀어붙이는 그와 단상 아래서 힘겹게 저항하는 야당 의원들 모습이 대비된 사진이었을 것이다.
한나라당이 야당의 배에 가까운 의석을 갖고도 그동안 비준안 처리를 미적거린 건 이런 사진이 가져올 역풍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10·26 재보선에서 민심 이반을 뼈저리게 확인한 마당에 또 다수의 힘으로 소수의 목소리를 억누르는 모습이 연출된다면 총선을 앞둔 의원들에겐 치명적이다. 그래서 이례적으로 본회의도 비공개로 열려 했던 것일 테다. 이렇게 위험한 사진을 김 의원이 최루탄 투척 장면으로 바꿔줬다. 내가 한나라당 의원이라면 김 의원은 고마운 사람이다.
민주당 지도부는 처음부터 협상을 통해 비준안을 합의 처리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년 선거를 위해선 야권 통합이 꼭 필요하다. 통합 파트너인 민노당 등 진보 진영은 한·미 FTA에 결사반대한다. 민주당이 합의해줬다면 야권 통합은 깨졌을 가능성이 크다. 강경파에선 “차라리 우리를 밟고 가라”는 목소리가 노골적으로 나왔다.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여당과 그에 저항하는 소수 야당의 모습이 연출되는 건 불리할 게 없다. 비준안 강행처리 후 트위터에 등장한 주장 중 하나는 내년 선거에서 이런 상황을 막아낼 수 있는 인원을 국회로 보내주자는 거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설득하겠다고 찾아오고, 한나라당 협상파가 양보안을 내놓을 때 민주당은 ‘저 친구들 왜 저러지? 빨리 해치우지 않고…’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민주당 의원이라면 한나라당은 좀 늦긴 했지만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사람들이다.
남의 마음속에 들어갈 볼 재주는 없지만, 사람의 속내란 게 꼭 눈과 귀로 확인해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특히 선거를 앞둔 정치판 사람들의 생각은 그들의 말과 정반대인 경우가 많았고,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 ‘최루탄 국회’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모두 ‘윈-윈’한 최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김 의원이 최루탄을 터뜨린 덕에 한나라당은 강행처리에 따른 불이익을 최소화할 수 있었고, 민주당은 어쨌든 끝까지 반대하며 거대 여당에 밟혔고 야권 통합을 지켰으니까. 최루탄이 터져서 ‘이익 균형’이 맞춰지는 곳, 한국 국회다.
태원준 정치부 차장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