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문일] 검은 고양이건 붉은 고양이건
입력 2011-11-23 17:37
“박원순 시장이 이념에 얽히지 않고 實事求是 한다면 색깔이 무슨 상관이냐만…”
한나라당 지지자인 어느 아버지가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아들에게 박원순 찍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들은 “박원순이 어째서 빨갱이냐?”며 ‘바락바락’ 대들었다고 한다. 선거 때문에 부모 자식 간 이 같은 갈등을 겪은 가정이 적지 않았을 터다. 30대 초의 아들이 빨갱이를 제대로 이해할 리 없다. 해방둥이 아버지 역시 유년 시절에 6·25전쟁을 겪긴 했지만 구체적 이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세뇌된 추상적 인식이 클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얼마 전 민방위 훈련 상황을 참관하다가 60대 할머니에게 목덜미를 얻어맞았다. 박 시장은 할머니로부터 ‘빨갱이’라는 욕도 먹었다. 박 시장은 앞서 서울시장 선거 유세 중에도 은평구에서 한 시민으로부터 같은 욕을 들었다. 욕먹고 기분 좋을 사람 없지만 그 때 박 후보의 안색은 무척 침울했다고 한다.
기실 박 시장이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기 전에 그를 빨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거나 아주 소수였을 것이다. 그에 대한 지지율이 5%에서 시작한 데서 보듯 박원순이란 이름은 일반 국민의 안중에 미미했다. 시민운동의 대표적 존재라고 하나 그가 벌인 시민운동이란 것이 국민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는 것임이 검증 과정에서 드러났다. 굴지의 대기업들 사이를 유영(遊泳)하며 다양한 형태로 협찬을 끌어낸 그를 두고 자본에 적대적인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자본 친화적 인물로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선거에서 그를 선택한 젊은 세대는 갑자기 등장한 빨갱이란 수식어를 근거 없는 비방으로 보고 오히려 반발했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이 안이하고 허술한 판단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설사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박 시장은 진성(眞性)일 리는 없고 기껏해야 과거 ‘심파’로 불린 동조자(同調者) 수준이 아닐까 싶다. 유신시대에 유행했던 반체제 인사(dissident)라는 호칭도 어울려 보인다.
유세 기간 중 그는 홍대 앞의 도서축제 행사장을 찾았다. 한 출판사의 부스를 골라 들어간 그는 ‘체 게바라’라는 책을 손에 들고 “젊은이라면 게바라를 읽어야 한다”는 말로 즉흥 판촉을 했다. 게바라는 종속(從屬)이론과 함께 라틴아메리카의 반미(反美) 혁명 아이콘이다. 종속이론은 지금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지식 폐기물이 되었지만 게바라는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극찬한 사르트르 같은 좌파 지식인들에 의해 신화가 되었다. 피츠패트릭이 그린 게바라 초상이 티셔츠와 포스터, 문신 등으로 상업적으로 성공한 글로벌 이미지 상품이 되어 자본주의식 대량 소비가 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게바라를 한국사회 젊은이들의 필독서로 권하는 박 시장에게서 이념적 경향과 상당한 시대착오가 느껴졌다.
취임 한 달 남짓한 동안 박 시장의 행보는 의외로 차분했다. 시장직 인수 준비 없이 바로 서울시에 입성했기에 시정의 방향을 잡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고 아직은 공무원들의 ‘전문성’을 경청하는 단계일 것이다. 지지자들의 강한 요구 때문이겠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쟁점인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가 중앙정부 차원의 일임에도 서둘러 반대의견을 내놓았다가 무안을 당한 일도 있었다. 이러면서 점차 서울시 행정의 복잡성과, 웃는 쪽이 있으면 그 때문에 우는 쪽도 있는 민원(民願)의 상대성을 알게 될 것이다. 하여 모든 시민에게 산타클로스가 될 수 없음에 곤혹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에게서 희망을 읽는 단서가 된 것은 금연지역으로 지정된 공원에 흡연구역을 설치하려던 서울시 계획을 박재갑 교수의 항의를 받고 단번에 없던 일로 해버린 일이다. 그의 독단이 비판받기도 했으나, 행정 전문가들의 영향을 받거나 의지하지 않고 절차의 덫을 과감히 무시하는 결단은 신선했다. 양화대교 공사를 중단하겠다던 선거 공약도 현실 여건을 살펴보곤 취소했다. 그가 이처럼 이념의 덫에 걸리지 않고 실용을 위주로 서울시 행정을 쾌도난마(快刀亂麻) 한다면야 그의 색깔이 검건 붉건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도 든다.
문일 카피리더 norw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