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 비준안 통과] 예산의총 하다 기습 이동… 표결 4분만에 ‘탕탕탕’
입력 2011-11-23 01:15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이 22일 한나라당의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본회의장 기습 점거 속에 신속하게 처리됐다. 정의화 국회부의장 사회로 FTA 비준동의안과 14개 부수법안이 통과되기까지는 40여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한나라당이 본회의 자체를 비공개 회의로 요청하면서, 역사적인 FTA 표결 순간을 국민들은 볼 수 없었다.
◇극비에 부쳐졌던 디데이(D-day)=한나라당은 이날 오후 2시 예산 관련 정책 의총을 열었다. 의총에 참석한 의원들 대다수가 본회의장 기습 점거 작전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 황우여 원내대표와 홍 대표는 지난 주말부터 가급적 서둘러 처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전날 최고위원 등 지도부와 “예산 관련 정책 의총을 열어 의원 정족수가 충족되면 직권상정을 시도하자”고 뜻을 모았다. 작전개시 시점이 22일로 최종 확정된 것은 이날 오전 11시, 황 원내대표가 민주당 김진표 원내대표를 만나 더 이상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면서다. 한나라당은 국회 본청 1층이었던 의총 장소를 회의 직전 본회의장 맞은편의 예결위 회의장으로 옮겼다.
황 원내대표는 의총 도중 의결정족수에 가까운 의원이 모이자, 박희태 국회의장에게 전화를 걸어 직권 상정을 요청했다. 박 의장은 오래전부터 잡힌 조선시대 실학자 박기수 선생의 묘소 방문차 지방에 내려가 있었다. 한 의원은 “의총 참여를 독려하는 문자가 계속 왔고, 홍 대표가 의원들 수를 헤아리는 것을 보고서야 오늘 처리하려는 것임을 눈치챘다”고 말했다. 의총에 불참했던 박근혜 전 대표도 본회의장엔 출석했다. 대구에서 저자 사인회를 갖던 이재오 의원은 KTX를 타고 상경 도중 상황종료 소식을 들었다.
◇與, 본회의장 기습 점거=내년도 예산에 관한 논의가 1시간쯤 진행되던 3시쯤, 황 원내대표가 앞으로 나왔다. 황 원내대표는 “협상 당사자로 야당을 지켜봤는데, 더 이상 민주당은 협상할 의지가 없는 것 같다”며 “이제 본회의장으로 이동합시다”라고 말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의총에 참여해 있던 의원 130여명은 본회의장으로 향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 점거에 성공하자 박 의장은 3시5분쯤 국회 본회의장에 질서유지권과 경호권을 긴급 발동했다. 이어 이날 오후 4시를 한·미 FTA 비준동의안에 대한 심사기일로 지정했다. 박 의장은 정의화 국회부의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회권도 넘겼다. 야당 의원들의 점거시도가 있기 전, 정 부의장은 국회 경위들의 호위를 받으며 의장석에 올랐다. 이어 자유선진당, 미래희망연대 의원들도 속속 본회의장에 들어오면서 일찌감치 의결정족수에 필요한 148명을 넘어섰다. FTA 여야 합의 처리를 요구하며 단식을 진행했던 정태근 의원 등 ‘국회 바로세우기 모임’ 소속 남경필 외교통상통일위원장, 구상찬 김세연 의원 등도 모두 입장했다. 늦게 본회의장 점거 소식을 접한 민주당 의원들은 3시20분쯤 본회의장에 들어와 항의했다. 야당 의원들은 “뭐가 부끄러워서 이렇게 하는 거야”, “(의장석에서) 내려와”, “몸싸움 좀 하지 말자”며 고함을 쳤다. 하지만 이미 단상은 경위들로 둘러싸여 있어 의장석 접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닫힌 문, 최루탄 소동 속 4분 만에 통과=본회의 개의를 앞둔 4시5분쯤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이 최루탄을 터뜨렸다. 매캐한 냄새가 퍼져나가자 정 부의장은 잠시 의장석에서 내려왔다. 급하게 본회의장에 공수된 물티슈로 박 전 대표를 비롯해 여당 의원들이 얼굴을 감쌌다, 극도로 혼란스런 와중에 민주당 김진애 의원이 여자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메모하는 박 전 대표 모습을 본 뒤 “박 전 대표가 화장을 고치고 있다”고 트위터에 올리는 바람에 친박계 의원들이 반박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민주당 김 원내대표와 정동영 의원, 민노당 이정희 의원 등이 의장석 단상 밑에서 항의하는 가운데, 정 부의장은 4시24분쯤 비준동의안을 직권 상정했다. 표결은 4분 만에 끝났다. 관련 부수법안 14개도 신속하게 처리한 뒤 5시1분, 정 부의장은 산회를 선포했다. 야당 의원들은 “대한민국 국회는 이제 끝났다”, “이건 무효야”라며 발을 굴렀다.
국회 의사과는 본회의가 비공개였다며 출석 의원 명단 공개를 거부했다. 이회창 전 대표 등 5명을 제외한 자유선진당 소속 의원 6명과 한나라당 황영철 의원이 반대표를 던졌다.
김나래 노용택 유성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