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코너-김명호] 미국의 정치 리더십 위기

입력 2011-11-22 17:42


연방정부 적자를 줄이기 위해 초당적으로 활동 중인 미 의회의 특별위원회(슈퍼위원회)가 합의안을 도출해 내는 데 실패했다. 향후 10년간 최소 1조2000억 달러의 연방정부 적자 감축안을 마련키로 한 백악관과 민주당, 공화당의 정치적 약속은 또 공수표가 됐다.

증세 여부와 정책 우선순위 등 경제 이념에 대한 진보, 보수 진영의 시각차가 워낙 큰 탓이다. 민주당은 정부 지출을 좀 늘려서 경기 회복에 도움을 주고, 부자 증세를 통해 재정 적자 일부분을 메우겠다는 입장이다. 공화당은 정부 지출 증액에 반대하고, 증세에 대해서는 대단히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지난주 뉴욕에서 만난 메릴린치의 한 투자팀장(수석 부회장)은 슈퍼위원회의 타결 실패 후 예상되는 후유증을 정치적 신뢰의 실종이라고 했다. 미국 경제의 충격이나 국가신용등급 강등 우려 같은 대답이 아니었다. 워싱턴 정치권의 당파적 행태나 타협 없는 상황으로 시장은 이미 한참 전에 슈퍼위원회의 활동이 불발로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진짜 위기는 정치권에 있다. 이제는 정치권이 무슨 말을 해도, 무슨 약속을 해도, 사람들이, 시장이, 그 말을 신뢰하기가 어려울 정도가 돼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정치의 질이 떨어지고 있다”며 정치적 신뢰의 위기를 걱정했다. 이것이 가장 큰 위기의 본질이며, 월가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보고 있다고 했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슈퍼위원회의 대타협 대신, 숙제를 내년으로 미뤘다. 내년에는 선거가 있고, 모든 것은 정치로 통하게 되는 구조가 된다. 백악관이든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자기편 유권자들의 입맛에 맞는 소리만 더욱 강하게 외쳐대는 정국이 될 것이다. 재정적자와 증세 문제를 놓고 워싱턴은 다시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드는 것이다.

현재 공화당은 세금 문제에 관한 한,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 배경에는 티파티가 있다.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공화당 의원 중 상당수가 각 지역에서 티파티의 도움으로 당선됐다. 그들의 발목을 강성 보수유권자 단체가 잡고 있는 것이다. 지지율 하락으로 위기를 느끼고 있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민주당은 전통적인 진보적 지지자들을 다시 결집시키는 게 가장 큰 재선 전략이다. 역시 운신의 폭이 좁다. 양쪽 모두 대타협을 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

공화당원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시대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이다. 당시 ‘레이건 민주당원’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었다. 정파를 떠나 지지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1989년 퇴임 때 그의 지지율은 취임 초보다 12% 포인트 높은 63%였다. 옛 소련을 붕괴시키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뤄낸 레이건은 미국인에게는 이제 신화로 통한다.

그 신화는 ‘보수주의와 실용주의, 홍보전문가의 결합으로부터 나왔다’는 분석이 있다. 레이건의 정치적 리더십은 흔들리지 않는 신념, 그리고 보수주의자들을 결집시키면서도 실용주의와 타협하는 정치적 태도와 기술을 잘 활용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요즘 미국 정치는 전에 없이 확실한 이념적인 신념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상대방 말을 듣는 귀는 아예 막혀버린 듯하다. 서로 쳐다보지 않는 정치는 국민의 신뢰를 바닥으로 떨어뜨렸고, 이는 다시 정치 리더십 실종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 언론들도 국제회의에서 미국이 말발이 예전 같지 않다는 시각들을 종종 내보이고 있다.

‘유일 슈퍼파워 미국의 붕괴 조짐은 21세기 초반 정치 리더십의 실종에서부터 시작됐다.’ 100년쯤 뒤 세계사 교과서의 한 줄 내용이 될지도 모르겠다. 정치 리더십의 실종, 남의 집 얘기만은 아니다.

워싱턴=김명호 특파원 mk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