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0만 크리스천의 마르지 않는 영적 샘터, 대한민국 기도원은 살아 있었다

입력 2011-11-21 20:46


늦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린 지난 19일 오전 0시. 경기도 가평 한얼산기도원에는 500여 성도들이 금요 철야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 뜨거운 찬양과 말씀 선포, 그리고 통성기도…. 성도들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게 역력하게 드러났다. 기자도 성도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쿵쿵’ 하는 커다란 북소리가 기도하는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찬양단의 파워댄스가 이어졌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민족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한국교회가 거룩함을 회복하고 전도 열정을 되살릴 수 있게 해 달라는 울부짖음도 있었다.

“오 주여, 주여. 한국교회를 굽어 살피시옵소서….”

통성 기도는 한참 계속됐다. 기도가 계속될수록 성도들의 표정은 밝아졌다. 모든 시름을 주님께 내려놓으니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머잖아 하나님이 그의 때에 따라 응답하실 거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인 듯했다.

1969년 설립된 한얼산기도원은 1973년 세워진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 등과 함께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은혜의 동산’ ‘기적의 동산’으로 불렸던 곳이다. 이들 기도원은 기도가 곧 영적 전쟁이라는 의식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했었다.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 이곳을 찾았고 만나기도 했다. 연일 계속되는 집회로 발 디딜 틈조차 없던 시절도 있었다. 특히 금요일 밤이면 기도소리가 더욱 쩌렁쩌렁했다. 기도의 응답을 간증하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기도로 국가의 위기를 극복했고 전 세계가 놀라워할만한 부흥과 성장을 일궈냈다. 각종 재해나 사고, 남북간 일촉즉발의 위기때도 기도원에서의 기도는 그치지 않았다.

한국의 기도원 운동은 서구의 수도원 운동과는 달리 한국적인 영성을 잉태해냈다. 기도를 통해 성령·신유를 체험했다. 1970∼80년대 성령운동의 젖줄 역할을 했으며 성도들을 영육 간에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기도원 기도는 절정에 다다랐다. 하지만 90년대 중반부터 기도원 침체 현상이 두드러졌다. 한국교회가 정체기에 접어든 게 기도원 쇠퇴에도 한 몫했기 때문이다.

교회 사학자들은 기도원 신학 부재와 상업주의적 운영, 잘못된 은사관 등의 이유를 들어 기도원 운동이 한풀 꺾이게 됐다고 분석한다.

특히 90년대부터 인력과 재정이 풍부한 중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자체 수양관 건립 붐이 일어났다. 설상가상으로 정부마저 삼각산 등을 자연휴식년제와 특별보호구역으로 만들어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기도원 발길이 줄어들면서 운영조차 힘들게 됐다.

한국기독교기도원총연합회(이사장 정진수 목사)에 따르면 70∼80년대 2700여개에 달하던 기도원과 기도처소는 현재 1000여개로 줄어들었다. 이마저도 실제 기도원을 운영하는 곳은 700여개에 그친다.

하지만 목회자들은 ‘산기도’를 새벽기도와 함께 한국교회 자산으로 꼽고 있다. 편안한 교회 의자보다는 척박한 곳에서 하나님과 일대일 대화에 집중하려는 불퇴전 믿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은밀한 골방과 토굴, 그리고 산기도….

한얼산기도원 부원장 이영금 목사는 “이런 때일수록 산기도의 영성을 회복해 한국교회 재부흥의 발판을 마련하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진수 이사장은 “예전의 기도원 운동을 벌여 한국교회가 다시 성장하길 간절히 기도드리고 있다”고 했다.

소나무를 붙들고 부르짖는 산기도 소리가 그립다. 나라와 민족, 교회의 위기 때마다 기도가 끊이지 않았던 기도원 영성으로, 오늘 한국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극복하길 기대해본다.

가평=글·사진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