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기도의 영성을 회복하자
입력 2011-11-21 19:34
[미션라이프] 늦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린 지난 19일 오전 0시. 경기도 가평 한얼산기도원에는 500여명의 성도들이 금요 철야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 뜨거운 찬양과 말씀 선포, 그리고 통성 기도….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들의 표정이 이내 진지하다.
기자도 그 옆에 무릎을 꿇었다. 찬송가 한 장을 부르기도 전에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쿵쿵’하는 커다란 북소리가 계속 나와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찬양단의 파워댄스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민족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한국교회가 거룩함을 회복하고 전도 열정을 되살릴 수 있게 해 달라는 울부짖음도 이어졌다.
“오 주여, 주여. 한국교회를 굽어 살피시옵소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 다퉈 외쳤다. 통성 기도는 한참이나 계속됐다. 어느새 어깨를 짓눌렀던 고민은 사라지고 감사와 희망이 가득 담긴 기도 소리가 메아리로 길게 울려 퍼졌다.
1969년 설립된 한얼산기도원은 1973년 세워진 오산리금식기도원 등과 함께 한국교회의 ‘은혜의 동산’ ‘기적의 동산’으로 불린 곳이다. 수많은 성도들이 기도원을 통해 하나님과 만나려고 기도의 줄을 붙잡았다. 금요일 밤이면 기도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연일 계속되는 집회로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였다.
교회를 위한 눈물의 기도뿐 아니라 개인의 문제도 주님 앞에 내놓고 간절히 기도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예배드리고 깨어지며 변해갔다. 기도는 곧 영적 전쟁이었다.
고비 때마다 국가는 위기를 극복했고 한국교회는 전 세계가 놀라는 부흥을 일궈낼 수 있었다. 무장간첩이 침투했을 때나 일촉즉발의 남북간 무력충돌의 위기 때도 ‘기도원의 기도’는 그치지 않았다.
기도원 운동은 기도를 통한 성령·신유 체험을 강조했다. 70∼80년대 성령운동의 젖줄 역할을 했으며 성도들을 영육간에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기도는 절정에 다다랐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기도원들은 침체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교회가 정체를 맞으면서 기도원도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이다.
한국기독교기도원총연합회에 따르면 70∼80년대 2700여개에 달하던 기도원과 기도처소는 현재 1000여개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실제 기도원을 운영하는 곳은 700여개에 그친다.
게다가 신학 부재와 상업주의적 운영, 잘못된 은사관 등 단점이 제기되면서 기도원 운동이 한풀 꺽이게 됐다. 90년대부턴 인력과 재정이 풍부한 중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이런 단점을 극복한 자체 수양관 건립 붐이 일기도 했다. 정부마저도 삼각산 등을 자연휴식년제와 특별보호구역으로 만들어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기도의 발길이 줄어들면서 기도원 운영마저 힘들 정도다.
하지만 목회자들은 ‘산기도’를 새벽기도와 함께 한국교회의 자산으로 꼽고 있다. 편안한 교회 의자보다는 척박한 곳에서 하나님과 일대일 대화에 집중하려는 불퇴전 믿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하나님만이 아시는 은밀한 골방과 토굴, 암혈에서, 그리고 산기도….
한얼산기도원 부원장 이영금 목사는 “산기도의 영성을 회복해 한국교회 재부흥의 발판을 마련하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도원총연합회 이사장 정진수 목사는 “기도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 때, 기도 운동을 벌여 한국교회가 다시 성장하길 간절히 기도드리고 있다”고 말했다.
산기도 소리가 그립다. 나라와 민족, 교회의 위기 때마다 기도가 끊이지 않았던 기도원 운동의 영성으로 한국교회의 침체를 극복하길 기대해 본다.
가평=글·사진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