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박희선] 은행 냄새가 싫다는 친구에게
입력 2011-11-20 19:26
가을이 깊어갈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뉴스가 은행의 고약한 냄새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 냄새는 우리가 건강식으로 즐겨먹는 은행나무의 열매 겉껍질에서 나온다. 뉴스는 이 냄새를 도시에서 몰아내려면 암수딴몸인 은행나무 중에서 수그루만 골라 심어야 한다는 둥, 그런데 나무가 몇 십 년을 자라 열매를 맺기 전까지 이를 식별하기 어려워서 문제라는 둥, 하나마나한 얘기를 반복해 왔다.
그러다 2주쯤 전인가, 드디어 은행나무 성별을 알아낼 DNA 분석법이 개발됐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는데, 이를 전하는 앵커의 마무리 멘트에 나는 목이 메고 말았다. “이제 고통스러운 냄새 없이 노란 은행잎의 낭만을 즐길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을 극명하게 드러낸 이 말을 다른 지구 생물들이 들을 수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나는 자연관찰을 즐기는 생태여행가다. 자연에 나가 멋들어진 풍경만 보지 말고 가능하면 다양한 생명세상과 만나려고 애쓰는 중이다. 자연관찰에서 향기는 아주 중요한 단서다. 향긋한 꽃 내음을 쫓는 벌 나비처럼, 코끝으로 천적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작은 동물들처럼 몸을 웅크리고 오감만 활짝 열어놓아야 궁금했던 생물들을 본연의 모습 그대로 만날 수 있다.
물론 자연의 향기 중에는 저절로 코를 틀어막게 하는 지독한 것도 있다. 지난해 가을 지리산 노고단 길을 걸을 때도 그랬다. 깔끔하게 정돈된 국립공원에서 지린내 같은 것이 내내 따라다녀 수상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금마타리라는 식물의 잎이 노랗게 물들 때 풍기는 냄새라고 했다. 이렇게 사연을 알고 나면 지독한 냄새마저 친근감이 생긴다. 나중에 다시 그 냄새를 맡게 된다면 얼굴을 찡그리기보다 반가워질 지도 모른다. ‘아, 벌써 금마타리 잎이 물드는 가을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자연의 향기는 색채, 촉감, 소리, 맛 등과 어우러져 한 생명을 이루고 있는 고유한 속성이다. 가을에 노란 은행잎이 쌓인 가로수 길을 걸으면서 그 냄새만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발상이란 참 잔인하지 않은가.
가로수로 너무 흔히 봐서 그렇지, 은행나무는 현존하는 지구 생명체 중에서도 꽤나 어른에 속하는 귀한 존재다. 고생대부터 발생해 공룡이 살던 쥐라기에 전성기를 이뤘던 식물로 과학계에서는 ‘살아 있는 화석’으로 칭송한다. 이런 나무를 가을에 아름다운 단풍 보겠다고 자동차 매연 가득한 아스팔트 옆에 심어놓고는 이제와서 냄새 때문에 구박하는 모양새라니, 말 못하는 나무에게 못할 짓이다.
환경적으로 거세된 은행나무 수그루들이 회색도시를 노랗게 물들일 미래 모습도 상상하기 싫기는 마찬가지다. 온 국민이 부디 한번만 더 생각해 보면 좋겠다. 은행 냄새가 그리 나쁜가? 그냥 우리 민족이 오래 묵은 장맛을 즐겨 왔듯이, ‘아주 오래된 지구 냄새’라고 정붙여 보면 안 되는가 말이다.
박희선 생태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