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셜리 발렌타인’… 평범한 중년 여성의 자아 찾는 여정
입력 2011-11-20 18:00
“‘맙소사, 벌써 마흔둘이구나가 아니고 셜리, 이제 마흔둘밖에 안 됐어. 어때 멋지지 않니?’라고 말할 거야.”
이 연극에는 ‘셜리 브레드쇼 부인’ 이외엔 누구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등장한다. 벽과 이야기하며 남편과 아들, 딸, 옛 여학교 선생, 친구 등 주변 사람들을 ‘연기’하는 셜리는 그야말로 이름을 잃은 중년의 여성 그 자체다.
배우 손숙은 이 1인극의 주인공, 1인 15역을 맡았다. 그러나 손숙이 연기한 것은 셜리 한 사람이다. 나머지 인물들은 극중 셜리가 연기한다. 1인극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손숙과 셜리는 꽉 채워진 존재감을 선사한다. 코미디와 드라마, 일상의 유머와 허탈이 모두 한 공간 안에 있다.
이야기는 셜리 브레드쇼 부인이 남편을 기다리며 저녁을 준비하는 부엌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녀는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목요일에는 스테이크 말고 다른 음식은 먹지 않는 까다로운 남편, 귀여운 어린아이였으나 이제는 다 커서 품을 떠난 아들과 딸, 한때 ‘셜리 발렌타인’이라 불리던 여학생이던 자신, 아무렇지도 않게 말로 상처를 주던 선생님, 예쁘고 똑똑했으나 이제는 창녀의 삶을 살고 있던 학교 동창과의 만남까지. 그 모든 시간을 지나서 부엌에서 감자와 계란을 요리하고 있는 중년의 부인이 거기 있을 뿐이다. 스테이크 대신 감자를 본 남편은 결국 밥상을 뒤집어엎었다.
2막에선 영원할 것만 같던 일상을 깨고 그리스로 훌쩍 여행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셜리가 그려진다. 여행은 임사(臨死) 체험이라 했던가. 늘 있던 집에 그녀가 부재한 순간, 짜증만 내던 셜리의 남편은 그녀를 데리고 오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관객이 보는 건 드디어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온 셜리의 모습이다. 모든 걸 다 내팽개치고 나서야, 셜리는 ‘발렌타인’이라는 성과 감정이 있는 인간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불이 꺼지자 한동안 침묵하던 관객들은 손숙으로 돌아온 배우가 인사한 뒤에야 박수갈채를 보냈다.
1986년 영국에서 초연돼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에서도 흥행에 성공했다. 윌리 러셀 원작, 글렌 월포드가 연출을 맡았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다음 달 4일까지 공연된다. 티켓 가격은 3만5000∼5만원이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