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된 농구대잔치… 그 뜨거웠던 열정을 아십니까
입력 2011-11-20 17:52
침체에 빠진 국내 농구에 ‘농구대잔치’는 아련한 추억이다. 1980년대 시작된 농구대잔치는 수많은 스타를 배출하며 90년대 초 프로야구에 버금가는 인기를 끌었다. 97년 프로농구가 출범했지만 여전히 90년 초·중반 ‘농구대잔치’의 인기에는 한 참 못 미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아이돌 스타에 버금가는 농구선수들의 인기
83년부터 시작된 농구대잔치 초기는 현대와 삼성의 라이벌 구도가 인기를 견인했다. 현대의 ‘슛쟁이’ 이충희와 삼성의 ‘전자슈터’ 김현준과 관련해 지금까지도 농구팬들 사이에선 두 사람 중 누가 더 슛을 잘 쐈는지를 가지고 입씨름을 하고 있다.
이후 89년 중앙대를 졸업한 허재가 기아에 입단하면서 현대-삼성 양강 구도는 깨졌다. 허재-강동희-김유택으로 이어지는 ‘허동택 트리오’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기아는 1980년대 후반 무적 군단으로 이름을 떨쳤고, 리더 허재는 ‘농구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93∼94 시즌 연세대가 역사상 첫 대학팀 우승의 금자탑을 이루는 등 대학팀들의 약진이 두드러지면서 농구대잔치 인기는 절정을 맞았다. ‘영원한 오빠’ 이상민과 ‘람보슈터’ 문경은, ‘코트의 황태자’ 우지원 등 실력 뿐 아니라 외모도 출중한 선수들이 출현한 시기도 이 때였다. 맞수였던 연세대와 고려대의 경기가 열리면 경기장 주변은 늘 오빠부대들로 가득 찼다.
당시 농구는 농구대잔치 뿐 아니라 미국프로농구(NBA)와 ‘슬램덩크’ 등 농구 만화의 유입, TV 농구드라마 인기 등으로 ‘겨울 스포츠의 꽃’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대한농구협회에 따르면 농구대잔치 94∼95시즌에는 총 40여만명의 관중이 입장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상민·문경은·우지원… 그때 스타들은 지금
농구대잔치 최대 인기 스타는 이상민이다. 이상민은 연세대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96년 상무시절에는 농구대잔치 사상 첫 트리플더블을 기록했다. 이후 프로무대에서도 지난 해 코트를 떠나기 전까지 매년 프로농구 올스타 팬 투표 1위를 차지할 만큼 오랫동안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2007년 KCC에서 삼성으로 트레이드됐을 때 팬들이 돈을 모아 신문에 격려 광고를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상민은 지난해 삼성에서 은퇴 후 미국 뉴저지로 가족과 함께 지도자 연수를 떠났다.
문경은은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던 농구대잔치 대학생 스타 중 처음으로 프로농구 팀 사령탑에 올랐다. 올시즌 SK 감독대행에 오른 문경은은 선수 시절처럼 매 경기 열정을 불태우며 하위권 전력의 팀을 강팀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올시즌을 앞두고 미디어데이에선 “6강에 들면 팬티 바람으로 춤 한 번 추겠다”고 특유의 쇼맨십을 자랑하기도 있다. 문경은은 사령탑에 오른 뒤 코치로 과거 맞수였던 고려대 출신의 ‘에어’ 전희철을 임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수려한 외모와 폭발적인 3점슛이 인상적이었던 우지원은 선수에서 해설가로 변신했다. 경기장에선 가끔 동갑내기인 전희철이 우지원에게 “우리 팀에 좋은 해설 좀 부탁한다”고 농을 건네는 장면도 목격된다. 우지원은 “내가 맡고 있는 곳에서 열심히 활동해 농구 붐을 다시 한 번 일으키고 싶다”고 말했다.
연세대 센터 서장훈은 여전히 LG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있지만 프로농구 최고령 선수가 돼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하고 있다. 고려대 시절 전희철과 함께 ‘철듀오’로 명성을 떨쳤던 ‘플라잉 피터팬’ 김병철은 올 시즌을 앞두고 오리온스에서 은퇴했다. 다른 스타들과 달리 김병철은 고려대 졸업 후 프로 원년에 데뷔 한 이래 단 한 차례도 팀을 옮긴 적이 없다는 이력이 있다. 김병철은 현재 리틀 오리온스 어린이 회원들에게 농구를 가르치고 있다.
이들과 함께 고려대 농구를 이끌었던 현주엽은 지난해 미국으로 스포츠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떠난 뒤 올해 귀국했지만 최근 투자 사기를 당하는 불운을 겪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