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회심-이민희 전 KBS 영상사업단 사장] 치유 기적으로 새살 돋던 날, 새 삶이 시작됐다
입력 2011-11-20 17:41
의심한다. 확인해야 한다. 나는 도마와 같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기자라는 내 직업과 어울리는 성향이기는 했지만 신앙을 갖는 데는 장애물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 따라 나갔던 교회. 중학교 3학년까지는 멋모르고 열심히 다녔다.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 교회에 가면 떡 하나라도 나눠주는 인정의 배부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중학교 3학년 이후 의심이 생겼다. 하나님은 나약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상 같았다. 나는 무교회주의자가 되었다. 집에서 가끔 성경을 뒤적거리기는 했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 시기는 20대 중반 1966년 조선일보 입사 후까지 이어졌다. 결혼을 계기로 다시 교회에 나갔다. 장모님이 독실한 크리스천이셨다. 하루에 8시간씩 성경 보고 찬양하시는 분이었다. 성화에 못 이겨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서울 녹번동의 작은 교회였다. 사람이 부족하다 보니 회계, 서기, 유년부 교사, 청년부장 등 각종 직분을 맡았다. 그러나 구원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의심은 여전히 내 마음에 도사리고 있었다.
의심이 믿음으로 바뀐 것은 그로부터 10여년쯤 뒤인 1976년 동양방송(TBC) 정치부 기자로 있을 때다. 어느 날 저녁, 우연히 동네에 있는 응암교회 앞을 지나갔다. 평일인데도 찬양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했다. 집회 중이었다. 치유의 은사를 가지신 김삼일 목사님이 강사이셨다. 집회 후반부에 김 목사님이 “이 가운데 병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십시오”라고 했다. 당시 나는 12년 전부터 달고 다니는 악성 무좀에 시달렸다. 우스워 보일 수 있지만 그 고통은 당해본 사람 아니면 모른다. 앞으로 나갔다. 나를 포함해 100여명이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천지 만물을 지으심을 믿습니까. 맹인을 보게 하시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신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 하나님이 능력을 행사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까.”
확신할 수 없었지만 매달려보자는 심정으로 “믿습니다”라고 외쳤다. “다 나았다고 생각하면 들어가십시오.”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가기 시작했다. 분위기에 떠밀려 자리로 돌아왔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라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발에 새살이 돋았다. 무좀이 나은 것이다.
복음을 귀로 듣고 가슴으로 믿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의심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주님은 너무도 명확하게 보여주셨다.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의심이 믿음으로 변한 순간부터 내 삶은 바뀌었다. 매 순간을 의지하게 됐고, 묻고 또 물었다. 크리스천으로서 보다 올곧고, 보다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오직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분명한 힘 앞에 순종하십시오.” 사랑의교회 출석하며 접한 고(故)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는 나의 신앙을 더욱 견고케 했다.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 TBC에서 당시 모 정부부처 출입기자였을 때 산하기관에 취재 갔다. 직원들이 저녁식사와 술을 대접했다. 마시는 척만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밤 12시쯤 여성 한 명이 숙소로 찾아왔다. 부적절한 접대 중 하나였다.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자신의 집은 12시가 넘으면 못 들어간다면서 재워달라고 하소연했다. 돌아가라 해도 막무가내였다. 들어오라고 한 뒤 “내가 지금 성경을 보고 있는데 같이 보자”고 했다. 황당한 눈으로 날 쳐다보더니 돌아갔다.
1982년 이후 한국방송공사(KBS) 특파원으로 일본에 머물면서 나는 한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의 역할을 감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신문, 잡지, 방송과의 인터뷰나 좌담회, 강연에서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책임’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일본 천황의 명백한 사과’를 촉구했다. 동시에 “일본이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많은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 학살하고도 1957년부터 역사적 사실을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부정확하고 왜곡되게 기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86년 귀국 후에도 투쟁은 계속됐다. 주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러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하는 것은 기자로서,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기자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KBS에서 신우회장을 맡으며 회원들에게 늘 강조했다. “해외 나가야만 선교사가 아니다. 국내에도 예수님 모르는 사람 많다. 우리 회사 기자, PD, 아나운서, 엔지니어 모두가 예수 믿으면 큰 역사가 일어난다. KBS를 황금어장으로 보자. 각자 파트에서 선교사의 역할을 하자.” 정기적으로 모여 말씀을 읽고, 삶을 나누는 시간은 고된 직장생활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휴식처였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임원이 되고 나서 더욱 돈독해졌다. KBS문화사업단 사장을 맡을 당시 회사의 누적 적자가 수십억이었다. 그냥 두면 도산하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회사를 맡은 지 한 달 됐을 때 감사원에서 부실 공기업 정리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문화사업단이 포함됐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본사에서도 회사를 없애기로 결정한 듯했다. 기도원으로 달려갔다. 회사는 살려야 하고, 구조조정은 해야 한다.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어야 한다. 왜 내게 이런 상황을 주셨느냐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런데 기도 중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는 응답을 들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튿날 본사 사장을 찾아갔다. “문화사업단의 사장은 나지만 하나님이 회장이시다. 그분 도움으로 구조조정할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로 돌아가 노조위원장을 불렀다. “우리 회사는 온몸이 곪아서 손발을 자르지 않으면 안 된다. 부서 절반 줄이고 봉급을 줄이자”고 간곡하게 설득했다. 구조조정이 시작되자 고등학교 동창부터 시작해 온갖 지인들로부터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아는 사람의 편의를 봐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공정해야 했다. 청탁을 하나도 받아주지 않았다. 구조조정은 성공적으로 이뤄졌고 회사는 창립 이래 최고의 수익을 올렸다. 그 덕분에 KBS 계열사 중 가장 큰 영상사업단 사장에 선임됐다.
34년 언론인 생활을 마친 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홍익대 광고홍보학 교수로 재직했다. 수업시간마다 학생들에게 링컨과 같은 크리스천을 소개한 뒤 세상을 따뜻하게 바꿀 꿈을 가지라고 가르쳤다.
내 나이 70세. 얼마 안 있으면 장로 은퇴식을 갖는다. 지난 3월부터 사이버대학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다. 여생을 소외된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나의 나이 많음을 걱정한다. 그러나 40여년 전 회심으로 얻은 믿음의 불씨는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다. 의심에서 변한 내 믿음이 죽는 날까지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고 싶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 이민희 전 사장
1941년 경북 경주 출생으로 64년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66∼68년 조선일보 기자, 68∼80년 동양방송(TBC) 기자, 80∼93년 한국방송공사(KBS) 기자, 93∼2000년 KBS 문화사업단, KBS 영상사업단 사장 역임. 2000∼2006년 홍익대 광고홍보학부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9년부터 ㈔사랑의복지재단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현재 서울 서초동 사랑의교회(오정현 목사) 장로로 섬기고 있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