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38) 한국교회의 해외선교(2)

입력 2011-11-20 17:31


러시아 파송 최관흘 목사 정교회 핍박당해

한국교회는 1907년 (장로교회의) 독노회를 조직해 선교사를 파송한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교회의 기본적 사명에 대한 자각이었다. ‘노회’라는 치리회의 조직과 함께 선교는 교회의 기본적 사명이라는 점을 구성원들에게 확인시켜 주는 의미가 있었다. 다른 한 가지는 동포애, 곧 동족에 대한 사랑이 선교의 기본적 동기였다는 점이다. 이미 판 덴 베르크(van den Berg)가 ‘예수의 사랑에 메여(Constrained by Jesus' Love)’에서 지적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고전적 의미의 선교 동기였다. 우리에게도 이 점은 동일했다. 말하자면 동족에 대한 영적 책임을 자각하고, 1908년에는 제주도에 이기풍을, 1909년에는 한석진 목사를 일본에 단기사역자로 파송해 교회를 설립하고 영적인 지도를 하게 했다. 인천 내리감리교회는 이보다 앞서 1902년에 홍승하 전도사를 하와이 한인들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한 일도 있었다. 개별교회로서 매우 이례적인 선교의 자각이었다.

시베리아 선교 시작

한국교회의 선교는 1913년 이전까지는 주로 자국민을 위한 선교가 중심이었다. 이런 동족을 대상으로 한 사역을 ‘선교’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화란이나 영국에서의 경우도 처음에는 해외에 거주하는 자국민을 위한 영적 봉사라는 취지에서 선교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우리나라의 경우도 자연스러운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주도와 일본에 이어 1909년에 시베리아 선교가 시작됐다. 1909년에는 장로교 목사 8인을 장립했는데, 그중 한 사람인 최관흘(崔寬屹·1877∼?) 목사를 시베리아에 파송함으로써 시베리아 선교를 시작하였다. 세기의 전환기에 국운이 기울어지자 많은 한국인이 국경을 넘어 만주, 시베리아 등지로 자유를 찾아 이주하여 갔다. 해방 전까지 이 지역으로 이주자는 15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중 24만명이 러시아에 정착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들 지역에 거주하는 동포의 수가 급증하자 1909년 회집한 제3회 장로회 노회는 최 목사를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선교사로 파송키로 결의했다. 발해의 거점 지역이었고, 후에는 여진과 거란의 땅이었다고 알려진 블라디보스토크를 한국에서는 해삼위(海蔘威)라 불렀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방을 정복하라’는 의미인데, 이곳이 해삼이 많다고 하여 해삼위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지만 이곳을 하이선웨이로 불렀던 중국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지리적으로 해삼위는 외국이었지만 선교의 대상은 한국인이었다.

최관흘 목사의 러시아 선교

최 목사는 1911년 총회에 보고한 문건에서 첫 2년 동안 이곳에 삼일교회 등 2개 처의 교회를 설립하고 13개 처의 기도소를 세웠고, 교인은 764명에 달한다고 보고했다. 박용규의 기록에 의하면 1910년 당시 그가 설립한 교회의 출석교인은 648명으로 세례교인 38명, 학습교인이 68명에 이를 만큼 그의 전도는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또 중국 만주 지방 선교사였던 감리교의 손정도(孫貞道·1882∼1931) 목사가 이곳을 방문하고 선교사역에 동참한 일도 있었다.

해삼위에서 선교활동이 성공적으로 추진되자 러시아 정교회는 이를 시기하여 ‘러시아정부는 국교인 러시아정교회 산하에서 선교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불응하자 최 목사는 1911년 12월 체포되어 구금되는 등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 목사는 선교사역의 지속이라는 이유로 본국 교회의 양해도 없이 1912년 12월 30일 러시아정교회로 개종하고 그 교회에 가입하였다. 이때는 한국의 장로교 총회가 러시아 선교를 사실상 포기한 상태였다. 장로교 총회는 선교사의 개종을 문제시하였고 함경노회는 1916년 그를 제명하였다. 해삼위 선교는 1918년 김현찬 목사가 파송되기까지 일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최 목사는 러시아정교회 신부로 8년간 활동했으나 러시아정교회의 극심한 핍박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양해하에 함북노회는 1922년 8월 31일 그의 복직을 허락했다. 1922년 함북노회에서 시베리아노회가 분립될 만큼 교회 성장이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최 목사의 선교의 결과라는 인식에서 이런 조치가 취해진 것이다. 복직으로 장로교 목사직을 회복한 최관흘은 내수청 지방(현재의 연해주 빨치산스크) 우지미교회에 부임했다.

여전도사 파송

최 목사를 시베리아로 파송하던 그해에 평양 여전도회는 제주도 여성들을 위해 이선광(李善光) 여전도사를 제주도에 파송하였는데, 그는 한국교회가 파송한 첫 여성 선교사였다. 1908년에 모인 제2회 독노회 전도국은 제주 선교사역을 더 확장시켜가기로 결의했다. 노회는 “가련하고 불쌍한 제주 여성들을 위해 여전도인 한 사람을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는데, 이 결의에 따라 평양여전도회연합회는 선교사 파송을 자원하여 여선교사를 파송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여성을 위한 여성 사역(woman's work for woman)”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물론 그 외에도 제주도에는 이기풍에 이어 김홍련(1908), 평신도 김창문(1911) 김형재(1911) 등이 파송되어 봉사한 일이 있다. 또 1912년에는 한 사람의 조사와 수명의 남녀 전도인이 파송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제주도는 ‘외지’로 간주되어 선교지로 여겼다. 교통의 왕래가 드물었고 언어 불통으로 제주도 방언의 새로운 마가복음이 번역되어야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13년 중국 산둥성 선교를 시작으로 진정한 의미의 해외선교가 시작되면서부터 제주도는 ‘내지’로 간주되어 지리적으로 근접한 전라노회가 이 지역 전도 책임을 맡게 된다. 전라노회가 전남·전북으로 나누어진 1917년 후에는 제주도는 전남노회 관할하에 있게 된다.

<고신대 교수,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