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가 드리는 이야기 주머니… 산문 69편 묶은 ‘잡문집’ 번역 출간
입력 2011-11-18 17:40
매년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지목되는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62)의 마니아 사이에서 소설보다 산문이 낫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하루키 산문은 정평이 있다. 그가 작가 데뷔 32년을 맞아 올봄에 낸 산문집 ‘잡문집’(김영사)이 번역 출간됐다. ‘어디까지나 잡다한 심경’이라는 부제가 붙은 머리말엔 이런 대목이 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나의 정신은 온갖 잡다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음이란 정합적이고 계통적이면서 설명 가능한 성분으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러한 내 정신 안에 있는 세세한, 때로는 통제되지 않는 것들을 긁어모으고, 그것들을 쏟아부어 픽션=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다시 보강합니다. 설날 ‘복주머니’를 열어보는 느낌으로 이 책을 읽어주셨으면 하는 것이 저자의 바람입니다.”
하루키 자신이 엄선한 69편의 미발표 산문들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문자향을 뿜어낸다. 우선 소설가란 무엇이며 소설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계속해서 가설을 쌓아가는 것”이라며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그런 가설들을, 마치 잠든 고양이를 안아들 때처럼, 살그머니 들어올려 이야기라는 아담한 광장 한가운데에 하나씩 하나씩 쌓아올린다. 얼마나 유효하고 올바르게 고양이=가설을 가려내어, 얼마나 자연스럽고 솜씨 좋게 쌓을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역량이 된다.”(‘자기란 무엇인가’)
독자의 허를 찌르는 원고지 1장 분량의 잡문도 있다. 결혼을 앞둔 한 지인의 딸에게 보낸 축하메시지가 그것이다. “가오리씨,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나도 한 번밖에 결혼한 적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별로 좋지 않을 때는 나는 뭔가 딴생각을 떠올리려 합니다. 좋을 때가 많기를 기원합니다.”(‘좋을 때는 아주 좋다’)
2009년 2월 이스라엘 최고문학상인 예루살렘상 수상 인사말은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으로 인해 1000여명의 팔레스타인이 목숨을 잃은 사건과 맞물린 민감한 시기를 의식한 양심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내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단 한 자리입니다. 국적과 인종과 종교를 넘어서서 우리는 모두 개개의 인간입니다. 시스템이라는 굳세고 단단한 벽을 앞에 둔, 하나하나의 알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벽은 너무도 높고 단단하며 또한 냉혹합니다. 시스템이 우리를 이용하게 놔둬서는 안 됩니다.”(‘벽과 알’)
번역가이기도 한 하루키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스스로 번역했음에도 정작 피츠제럴드의 장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밤은 부드러워’를 지목하면서 이렇게 강변한다.
“‘밤은 부드러워’는 ‘위대한 개츠비’에 비해 속된 표현을 쓰면, 얼마간 빈틈이 있는 소설이다. 물론 완성도가 낮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빈틈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포용력이 깊어질 성장의 여지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기는 해도 거기에 위험 요소가 끼어들 여지 역시 있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그러한 위험 요소를 함께 엮어넣는 데, 혹은 수용한 데 이 작품의 독자적인 특징이 드러나며 작가의 역량이 묻어난다.”(‘기량 있는 소설’)
이밖에 음악에 관한 해박한 지식, 주변 인물에 관한 인상기, 도쿄 지하의 흑마술에 이르기까지 그의 뇌리에 자리 잡은 상념들은 소설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인간 하루키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