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향기 나무 앉더니 불현듯 오렌지로 열렸다”

입력 2011-11-18 17:43


# 에피소드 1

“내가 언니, 언니라고 불렀던 그 여자/ 시장에서 뭔가 배달시킨 그 여자/ 빈집이 무서워서/ 빨리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 젊은 여자는/ 남편의 아내였다/ 나의 남편과 살고 아기를 낳은……/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 얘긴가/ 무슨 이런 꿈을 꾸느라/ 직장에 지각까지 하면서 끙끙대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회라지 송침이라고 중얼대며 깨어났는데/ 백석 같은 평안도 사람이나 쓰는 이 말/ 솔가지를 꺾어 단으로 묶은 땔감이라는 이 말/ 그렇다면/ 회라지 송침이 단째로 들어간다는 아궁이란 누구?/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고 꿈의 끝자락에서/ 이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일까”(‘회라지 송침’ 부분)

꿈속에 ‘불현듯’ 나타난 그 여자는 내가 언니라고 불렀던 여자다. 남편의 아내는 ‘나’인데 그 여자도 남편의 아내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나’인가. 시적 화자가 꿈에서 솔잎 바늘에 무수히 찔리지 않았다면 회라지 송침이라고 중얼거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위 눌린 꿈에서 나타나는 그 여자는 누구인가.

# 에피소드 2

“예쁜 여자애가 이어폰을 꽂고 걸어가면서, 그래 여섯 시에 거기에서 만나. 허공에 대고 말한다. 그는 누구인가. 그 향기는, 그 목소리는 날아간다.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날개에 올라 지붕과 지붕, 신호등과 다리, 숲을 지나 호수, 호수에 주저앉아/ 다 잊어버리고 만다. 거기서 살아간다. 어리둥절. 그 나라는 가로수가 오렌지나무래. 걸어가다가 손을 뻗쳐 따 먹을 수도 있대. 그래 거기서 만나.”(‘어리둥절’ 부분)

길을 걷던 ‘나’는 이어폰을 꽂고 걸어가는 여자애의 휴대폰 통화를 듣는 순간, 그 목소리를 타고 ‘불현듯’ 오렌지나무가 자라는 남쪽 어느 나라에 가 있다. 유체이탈이라도 한 듯. 여자애가 상대방과 약속을 정하는 ‘여섯 시에 거기’는 어쩌면 ‘나’에게 허락된 시공일 수도 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 에피소드 3

“며칠 전에는 취직이 되었다고/ 남쪽 어딘가로 기차를 타고 가는데/ 잘못 탔다고 하고/ 그런 역은 이 세상에 없다고도 하는/ 꿈을 꾸었다// 상록수, 반월, 대야미, 수리산/ 역의 이름들이 꾸는 꿈은 허황, 찬란하고/ 누구인가, 쉬지 않고 바퀴를 돌리게 하는 자는.”(‘창문들’ 부분)

‘나’는 가고자 하는 행선지를 택해 표를 끊고 올라탄 기차에서 잠깐 조는 사이에 ‘그런 역은 없다’고들 말하는 꿈을 꾼다. 꿈은 내가 꾼 것일까, 창밖으로 스쳐 지나간 수많은 역들이 꾼 것일까. 꿈과 현실이 뒤섞인 이질적인 시간 속에서 ‘불현듯’ 의문을 품게 된다. 이 허황, 찬란한 꿈의 바퀴를 돌리는 자는 누군가.

최정례(56)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문학과지성사)는 이렇듯 꿈과 현실이 뒤섞인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홀로 중얼거리는 한 여자의 모노드라마를 보여준다.

여자가 꿈 혹은 현실에서 보았다는 이미지는 늘 ‘불현듯’ 나타난다. 도처에서 불쑥불쑥 출현하는 낯선 사물과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라는 시공간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어리둥절은 부지불식간에 느끼는 시적 자아의 자각과 관련이 있다. 이 이상한 해프닝은 현존의 시간 자체가 자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연유된다. 그러므로 시집의 핵심 이미지는 에피소드나 해프닝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낯선 사물과 낯선 사람이 기습적으로 출몰하고 있는 현재라는 시간성 자체에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함돈균에 따르면 여기서 현시되는 것은 데자뷔로서의 현실이 아니라, 현실 그 내부로 벌려진 불가해한 간극, ‘심해의 칠흑 같은 밤’ 혹은 ‘캄캄한 그 어디’이다. 다시 말해 ‘현재’라는 시간의 전체를 조망할 수 없는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해,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이 ‘불현듯’ 고개를 치켜든다는 것이다. 이 아이러니야말로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결핍을 무의식적으로 메우고자 하는 너무도 절실한 마음의 풍경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존재하는 것보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기울고 있는 한, 최정례의 언어는 ‘진실’에 가깝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