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옛 얼굴은 추악했다… ‘중세의 뒷골목 풍경’ 저자가 말하는 암흑기
입력 2011-11-18 17:53
고대 로마인만이 아니었다. 중세 유럽인들에게도 목욕탕은 사교의 중심이었다. 혼담과 불륜, 음주, 파티, 심지어 외과수술과 치과치료까지 목욕탕에서 받았다. 목욕탕 인기가 시들해진 건 매독 때문이었다.
지금도 전해지는 독일 범죄 집단의 은어는 중세 유랑인 암호가 기원이다. 방문했던 집 대문에 ‘○, V, +’ 같은 표시를 해서 ‘매 맞을 수도 있는 집’ 같은 생계형 정보를 전했다. 중세 유럽에는 진짜 거지임을 증명하는 거지증서, 구걸이 허용되거나 금지된 시간이 있었다. 거지 수가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다. ‘도시 괴담’ 수준의 황당한 교황 이야기도 있다. 어느 교황은 유부녀와 바람피우다 맞아죽었고, 또 다른 교황은 정치적 복수를 위해 해골에 죄를 물었다.
중세 유럽 1000년사에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없을 수 없다. 독일 예나대학에서 비교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고 20여년간 중세 종교를 연구해온 양태자씨의 ‘중세의 뒷골목 풍경’이랑 그중에서도 가장 음습하고 축축하고 냄새나는 중세사를 추려 들려준다. 더럽고 부패하고 극악하고 잔인한 중세. 그 시절 이야기다.
사형 집행인, 거지 vs 교황
유랑악사와 거지, 도둑, 가축 도살자, 동물 박피공, 제혁공, 사형 집행인, 넝마주이, 광대, 시체 묻는 사람. 저자 양씨의 관심은 중세 사회의 변방에 있다. 그는 “당시 아웃사이더와 주류 시민을 가르는 사회적 분리는 철저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사형집행인은 외출할 때 반드시 붉은 코트를 입어 제 신분을 알려야 했다. 술집이나 식당에서는 주인과 손님에게 허락을 구해야 입장할 수 있고, 일반인과 겸상은 금지됐다. 식당 벽에 아예 전용식기와 컵을 걸어두기도 했다.
천대받았지만, 중세 도시를 지탱한 건 이들이었다. 우선 숫자가 무시 못할 다수였다. 1380년 독일 뤼벡 인구 2만2000∼2만4000명 중 거리를 떠도는 인생은 절반 가까운 42%. 사료가 전하길, 도시별로는 평균 40∼60%였다. 당연히 사회적 역할도 컸다. 본업 외에도 분뇨를 치우고 시체를 매장하고 쥐를 잡는, 아무도 하고 싶지 않지만 꼭 해야만 했던 도시의 잡무가 이들의 손을 거쳤다.
책은 길거리 인생의 반대편에 권력의 정점, 교황을 배치했다. 비루한 밑바닥 인생과 그만큼 비열했던 최상층부 권력다툼의 대비다. 9∼11세기 164년간 바티칸에는 무려 45명의 교황이 거쳐 갔다. 한 명이 4년도 버티지 못한 셈. 그중 3분의 1은 교황자리를 박탈당했고 나머지 3분의 1은 추방당하거나 살해당했다. 해골에 옷을 입혀 재판에 회부한 ‘시체 공의회’ 사건은 치열한 권력싸움이 낳은 희대의 명장면이다. 896년 교황 스테파노 6세는 자신을 교황으로 추대해준 유력 가문에 복수하기 위해 전임 교황 포르모소의 묘를 파헤쳐 해골을 꺼낸 뒤 옷을 입혀 피고석에 앉혔다.
성적 문란의 대명사는 교황 요한 12세였다. 교회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플레이보이’로 통하는 그는 매춘에 열중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로마에 성지순례 온 여자와 과부, 소녀들을 성적으로 공격했다. 동시대인들은 아예 ‘교황이 늘 매춘부에 둘러싸여 있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마지막은 비참했다. 기혼녀를 성폭행했다가 남편에게 얻어맞아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
성직자의 부패는 신흥종교가 생겨날 비옥한 토양을 만들었다. 위그노(프랑스 신교도)와 루터파(독일) 같은 신교도의 출발이다. 양씨는 그중 실패한 개혁파에 주목했다.
“우리는 위그노, 루터 같은 성공한 개혁파만 기억하지만 1200년 무렵 독일에는 발덴저, 알비겐저 등 그보다 훨씬 많은 개혁파가 생겨났어요. 물론 그들은 대부분 실패했죠. 불에 타고 목이 잘리고 수레바퀴에 짓이겨진 채 죽었지요. 하지만 실패했다고 무의미했던 건 아닙니다. 끝내 좌절했던 이들을 이해해야 중세 종교의 제 모습이 비로소 보입니다.”
그림자도 역사다
양씨는 “나를 중세로 이끈 건 종교학과 죽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종교를 탐구하다 유럽 중세로 진입했고, 중세사에 대한 관심은 다시 비주류 인생, 그들의 억울한 죽음으로 이어졌다. 그건 물음이 물음을 낳은 필연적 과정이었다. 누가 마녀로 몰려 목숨을 잃고 누가 성녀가 됐는가.
몇 백년간 계속된 유럽 마녀사냥의 희생자는 5만∼6만명. 하지만 목숨을 잃은 건 대부분 시골 아낙과 과부, 고아소녀들이었다. 만약 마녀의 의식을 올린 게 왕의 애첩이라면, 당연히 처벌은 없었다.
양씨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애첩 몽테스팡은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점쟁이를 동원해 악마의 의식을 올렸다. 하지만 관련 증언과 자료는 왕실에 의해 모조리 수거된 뒤 남김없이 불태워졌다”고 말했다. 사건이 알려진 건 당시 치안담당자가 남긴 필사본 덕이었다. 결국 교리에 어긋났다는 이유로 처벌받고 죽은 사람들, 대부분 비주류 인생이었다.
실패하고 죽고 잊혀진 이들을 통해 중세를 보자고 하는 이유. 양씨는 “종교의 악행을 까발리고 공격하자는 게 아니다. 사실(史實)을 사실(史實)로 들여다보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1900년 이후 유럽학자들은 종교적 금기를 뚫고 과거 교회의 부패, 부정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자유롭게 연구가 이뤄지고 있어요. 예를 들어 독일의 베른트 울리히 헤르게멜러 교수는 평생 중세 수도자들의 타락과 비리를 연구했습니다. 독일 학계와 종교계는 그걸 존중해주지요. 그게 유럽의 옛 모습이고 역사이니까요. 그걸 알아야 더 나은 미래를 말할 수 있으니까요. 먼 나라의 옛날 얘기이긴 하지만, 우리도 그걸 해보자는 겁니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