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 堂’ 3평서 피어난 유쾌함… 여행작가 박상준, 카페 주인으로 사는 이야기

입력 2011-11-17 18:38


서울 부암동에 가면 ‘유쾌한 황당씨’를 한 번 찾아가 보세요. 복잡하게 꼬인 세상에 지친 날이라면 더욱 말이죠.

광화문에서 부암동 가는 초록버스를 타고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지나 ‘부암동 주민센터’ 정류소에 내리면 됩니다. 내리자마자 보이는 노란색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주인장 황당씨가 반갑게 맞아줄 겁니다. 커피를 주문하지 않아도 좋아요. 길을 물어 봐도 좋고, 부암동 산책을 안내해 달라고 부탁해도 좋아요. 황당씨는 무척 기뻐할 겁니다. 황당씨는 할 일이 없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저 유유자적하게 살 뿐이지요.

유쾌한 황당씨

황당씨를 찾아간 건 지난 14일이었다. 간판 없는 카페. 문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유쾌한 황당(黃堂)’이란 포스트잇만한 종이가 붙어 있었다. 내부 공간은 비좁았다. 3평이랬다. 작은 싱크대와 냉장고, 긴 테이블과 의자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손님은 없었다.

황당씨의 본명은 박상준. 서른여덟 노총각이다. 직업은 프리랜서 작가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 작가지, 일이 끊기면 밥 굶기 십상이다. 카페는 지난해 4월 보증금 3000만원, 월세 43만원에 인수했다.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카페를 인수했건만 매일 파리만 날린다. 커피(아메리카노 기준) 한 잔 값은 4000원. 하루 손님이 많이 와 봐야 10명이니 계산은 뻔하다. 불안정한 작가의 삶에 마침표를 찍기는커녕 카페를 유지하기 위해 부지런히 일감을 찾아야 할 것 같은 상황. 그래도 웃는다. 왜냐. 유쾌한 황당씨니까. “몽테뉴가 그랬죠. 가장 명백한 지혜의 징표는 항상 유쾌하게 사는 것이라고.”

황당은 카페가 ‘노란집(외부가 노란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이라 불리던 것에 착안해 박씨가 한자어로 만든 이름이다. ‘누를 황’에 ‘집 당’자다. 하지만 사람들은 황당무계하다 할 때의 ‘황당’이라 생각한다.

이름 대로 운명도 따라간다고 했던가. 박씨는 ‘유쾌한 황당’의 주인이 되고나서부터 인생이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사업은 부도나고, 직장에선 내쫓기고, 여자친구한테는 차이고, 유쾌한 일이라곤 도무지 생기지 않던 그에게 어느 날부터 유쾌한 일이 생기고, 유쾌한 사람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란’이라는 소녀

처음 가게를 열고는 한동안 친구 외엔 손님이 오지 않았다. 손님이 없는 날엔 원고 작업을 해볼까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원고는커녕 일기도 안 써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세검정에 산다는 한 소녀가 카페에 들어왔다. 이름은 란이. 나이는 스물 한 살. 소녀라기엔 나이가 좀 많지만 어쨌든 소녀로 통한다. 란이는 얼굴도 목소리도 귀여웠다. 란이는 미대 입시생으로 커다란 스케치북을 테이블 위에 펼쳤다. 그날부터 란이는 매일 카페에 들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해가 저물 무렵이면 란이는 카페에 왔다. 란이는 말수는 적었지만 행동 하나하나가 재미났다. 멀뚱히 정류소 앞 의자 앞에 앉아 있기도 하고, 어디선가 솔방울을 주워와 선물로 주기도 하고, 어느 날엔 호떡도 사왔다. 란이는 언제부턴가 가게 주인처럼 행동했다. 황당씨가 카페를 비우면 란이가 주인이 돼 손님을 맞았다. 란이 덕분에 황당씨는 일주일씩 열흘씩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사실 란이가 카페를 작업실처럼 쓰는 바람에 황당씨가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나밖에 없는 테이블에 란이가 2절 스케치북이라도 펼쳐 놓으면 그날 장사는 공친다고 봐야 한다. 손님이 들어와 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다. 사방에 흩어진 지우개 똥은 비로 잘 쓸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때때로 눈치를 주면, 란이는 그 좁은 공간 안에서 메뚜기처럼 여기 저기 옮겨 다닌다. 손님이 오면 알아서 스케치북도 접는다. 1년 8개월이 지난 지금. 란이는 황당 카페의 ‘마스코트’다. 황당씨 보러 오는 손님은 없어도 란이 보러 오는 손님은 있다.

단골부대와 숨결콘서트

란이 외에도 스물 아홉 달님이와 친구들, 심야오뎅집 꽃미남 사장, 미용실 주인 등 단골이 제법 늘었다. 단골이라기보다 친구에 가까운 이들. 스물아홉 살 달님이와 또래 친구들은 요즘 카페에 오면 스물아홉 살 여자의 삶을 한참 얘기하다 간다. 심야오뎅집 꽃미남 사장은 견제 대상이다. 얼굴도 잘생겼지만 마음까지 천사라서 비교될까 두렵다. 에스프레소 커피 한 잔에 지하 화장실의 고장난 전등을 고쳐주고 간 ‘전설의 인물’로, 황당 카페 단골들 사이에선 영웅이 됐다.

미용실 주인 아가씨는 툭툭 던지는 말이 예술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그냥 즐기면 돼.’ 배우 이영애가 TV CF에서 했던 대사처럼, 이 아가씨는 심오한 진리를 너무도 쉽게 던져 버린다. 개성 넘치는 친구들과의 소통은 삶에 활력이 된다.

“어느 순간엔 다 친구가 돼요. 마을 반상회를 열어도 될 만큼 서로 가까워졌죠. 좁은 공간의 특수성 때문에 너와 나의 거리가 좁혀질 수밖에 없거든요. 그게 좋아 찾아오고, 그게 좋아 저도 매일 문을 열죠.”

애초부터 커피 맛으로 인근 카페와 경쟁할 생각은 없었다는 황당씨. 오로지 ‘인간미’와 ‘재미’로 카페 살림을 하고 있다. “누군가를 웃게 할 수 있다면 그게 제일의 행복인 거 같아요. 말이든 글이든 남들 웃겨보려고 하죠.”

황당씨라고 항상 즐겁고 유쾌하기만 하겠는가. 프리랜서 작가로 살아가는 것도 버거운데 하루 손님이라고 해봐야 10명도 채 안 되는 카페를 운영한다는 게 쉬운 일이겠는가. “힘들죠. 사람이 좀 쫀쫀해질 때도 있더라고요. 가끔 계산하는 걸 깜빡하고 나가는 손님이 있는데, 그래봐야 5000원, 1만원이거든요. 스트레스 받더라고요.”

황당씨는 하지만 그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해지려고 한다. “누군가를 웃게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생각해요. 실연한 손님이 카페에 와서 한참을 울다 갔어요. 그 손님은 비록 웃지 않았지만 슬픔을 덜고 나갔겠지요. 그게 웃는 거지요.”

비장의 무기도 있다. 3평 카페에서 펼쳐지는 콘서트. 지난 9월 싱어송라이터 ‘료운’이 첫 콘서트를 열었고, 지난달 29일에는 재즈 트리오 ‘오키나와 킴 트리오’가 색소폰, 기타, 콘트라베이스 협연을 보여줬다고 한다. 관객은 단골부대를 중심으로 총 10명. 3평짜리 카페에서 공연이 가능할까. “가능하죠. 그러니까 숨결까지 느껴보자고 해서 공연 이름이 ‘숨결 콘서트’예요.”

황당한 콘서트일 것이다. 그럼에도 호응은 뜨거웠단다. 실험 정신이 돋보이는 뮤지션이나 색다른 경험을 추구하는 관객들은 만족했다. 오는 26일에는 여성 뮤지션 ‘여름에’ 공연이 잡혀 있다. 네이버 카페 ‘Cafe 유쾌한 황당’에 오른 콘서트 공지에 댓글이 붙었다. ‘와우! 이번에도 멋진 기획 마련하셨군요. 이건 인맥의 힘인가? 박씨의 능력인가? ㅋ.’ 답글이 따라 붙었다. ‘박씨의 운발이라고 해두지요. 곧 뵙기를 ㅋㅋㅋ.’

당 시리즈

유쾌한 황당씨의 황당 카페와 유사한 ‘당’ 카페들이 있다. 먼저 남산 자락에 카페 ‘적당’을 낸 사진작가 허희재씨. 황당씨의 친구인 허씨는 커피 맛도 적당, 장소도 적당, 모든 게 적당하다는 의미로 카페 이름을 지었다. 어떤 이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고스톱이 좋다며 ‘쇼당’을 구상중이라고 계획을 전해왔고, 어떤 이는 웰빙 카페로 ‘혈당’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홍익대 앞 주점 ‘골빈당’도 있었다. 골빈당은 지난달 문을 닫았다.

당 시리즈 카페가 얼마나 생겨날지 모르는 일지만, 황당씨의 유유자적한 운영을 보고 “그럼 나도?”라며 시도해보려는 사람들이 제법 된다고 한다. 황당씨는 카페는 카페대로 재밌게 운영하면서 지난해와 올해 제주 올레길을 순례해 그 여행기를 책으로 냈다. 욕심을 내지 않는 한 카페 주인과 프리랜서 작가의 삶은 병행 가능한 것이다. 최소한의 생계 수단이자 소통의 창구로 카페를 운영하는 일. 저마다 숨 막히는 생존경쟁을 벌이는 한국 사회에서 소박하게 안분지족을 실천하는 황당씨의 일상은 오히려 부러움을 주는 삶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지난 15일 카페에 또 갔다. 전날은 장시간 황당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지만, 이날엔 서로 말을 아꼈다. 황당씨는 느지막이 카페 문을 열어 설거지와 청소를 간단히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기자가 카페 주인이 됐다. 손님은 없었다. 카페엔 전재덕의 하모니카 연주곡이 흐르고, 유리창 밖엔 바람결에 노란 은행나무 낙엽이 흩날렸다. 건너편 담장에 드리워진 담쟁이 넝쿨 위로 까치 한 마리가 날아갔다. ‘딸랑 딸랑.’ 손두부 파는 아저씨가 지나갔다. 부암동의 가을은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이 여유! 이 소박함! 이 아름다움!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데 란이가 왔다. 란이는 능숙하게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 기자에게 건넸다. 기자는 과자로 보답했다. 황당씨는 저녁 7시30분에야 돌아왔다. 사진작가 육심원(78) 선생의 인터뷰가 잡혀 자료를 찾아보고 오는 길이랬다.

기자는 그날 취재를 마치고 팀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부암동에 카페 겸 집필실(팀 공용) 하나 내시죠.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 43만원인데.’ 곧바로 답이 왔다. ‘생각이 굴뚝같다.’

글=이경선 기자, 사진=김지훈 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