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시대 두렵지 않은 두 곳… 헌책방, 골방에서 나오다
입력 2011-11-17 18:12
“중고책은 낡고 헐고 버려진 책이 아니라 지금 내 앞에 있을 때 늘 새로운 책으로 다시 태어난다. 책은 늙지 않고 죽지도 않으며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으니까. 언제 만나도 갓 태어난 아이이며, 청춘이고, 사랑하는 연인이다.”(윤성근의 ‘심야책방’ 중)
한국 사람들이 책을 안 읽기 시작한 건 한두 해 된 일이 아니다. 지난해 한국 성인 100명 중 35명은 1년간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는데, 이는 조사가 시작된 1994년 이후 최저다. 출판 시장 불황은 매년 신문 지면에 반복해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설상가상으로 아이패드 등 태블릿PC가 나오면서 그나마 남은 시장도 전자책에 내주게 생겼다. 서점의 멸종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하물며 헌책방은 오죽하랴. 인사동의 ‘통문관’처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들이야 버틸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헌책방은 비디오 대여점이나 카세트테이프 판매점처럼 하릴없이 사라지기만 해야 할 운명에 처했다. 이런 시대에 헌책방을 새로 내고 운영하는 시대착오적인 이들이 있다.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서점 소멸시대’에 헌책방의 필요성을 부르짖는 것일까? 헌책을 사랑하고, 헌책방 같지 않은 헌책방을 운영하는 두 남자에게 그 가치를 들어봤다.
서울 응암동의 골목길, 홈페이지에 나온 약도를 보고 왔건만 도무지 찾을 수 없다. 동네 두 바퀴를 뱅뱅 돌고서야 지하로 내려가는 작은 유리문에 붙은 안내문을 발견했다. A4용지 크기의 안내문이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상북)’ 입구를 알려주는 유일한 단서다. 입구를 찾는 것부터 ‘헌책방에서 좋은 헌책을 발견해내는 기쁨’을 주려는 의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정작 주인장 윤성근(36)씨는 “간판 값도 비싸고, 찾기 어려우면 아무나 잘 안 들어오는 좋은 점이 있어요. 가게세도 싸고”라며 장사하는 사람의 ‘기본’이 안 된 소리나 늘어놓는다.
토끼굴로 들어서면 앨리스와 다스베이더 가면, 피노키오와 레고 등으로 장식된 아늑한 공간이 나온다. 약 100㎡(약 30평) 크기의 가게는 헌책방이라기보단 카페 같다. 실제로 음료와 간단한 음식을 판다. 한쪽에는 주말 저녁에 공연이 열리는 작은 무대가, 다른 쪽에는 큰 소파가 있다. 책 읽다 쉬고 싶으면 쉬라고 뒀단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좋아하는 주인장이 2007년 만든 이곳은 헌책방이지만 헌책방이 아니기도 하다.
일반적인 헌책방과 모습과 많이 다르네요? “처음 문 열 때부터 무대를 만들고 프로젝터를 설치했죠. 영화도 보고 세미나도 할 수 있게. 19세기 유럽의 살롱 같은 곳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의 시도는 책과 먼지로 가득한 전통적인 헌책방 모습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지탄을 받기도 했다. 공연하고 음료 파는 곳에 헌책방이란 명칭을 달아선 안 된다는 주장이다. “저 역시 전통적인 헌책방 모습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기관지가 안 좋고, 제가 본 책만 가지고 운영하겠단 원칙을 갖고 있어서 이렇게 꾸몄어요.”
책 마니아들은 불만이었지만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곳이 마음에 들었는지, 집무실 꾸미는 역할을 이상북 주인장에게 맡겼다. “덕분에 언론에 많이 났죠. 근데 정작 제 책 관련 기사는 안 나더라고요. 허허.” 윤씨는 지난달 ‘심야책방’을 출간하는 등 책 이야기를 담은 저서 2권을 낸 바 있다. 하지만 그의 책은 이곳에서 구할 수 없다. “여긴 헌책만 파는 곳이니까요. 제 책은 아직 서점이나 인터넷 서점에 깔려 있어서….”
그는 활자중독자다. 어린 시절부터 국어사전이건 전화번호부건 껌종이건 글자만 있으면 닥치고 읽었다.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고, IT회사에서 일했지만 몸에 안 맞는 옷이었다. 회사를 나와 출판사, 헌책방에서 일하다 자신만의 헌책방을 차렸다.
책이 좋다면, 새책방도 있는데 왜 굳이 헌책방인가? “새책 서점은 내가 원하는 책만 팔 수 없어요. 출판사 영업이라는, 외부의 요인이 작용되죠.” 그는 대형 출판사와 서점들의 홍보로 움직이는 출판계에 부정적이다. “얼마 전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주인공 현빈 책장에 있던 책들은 모두 M출판사 계열 책이에요. 돈 없는 회사는 그런 홍보도 못하죠.” 하지만 헌책방의 컬렉션은 주인장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게다가 자기가 읽은 책만 파는 독특한 경영철학도 고수할 수 있다.
돈과 홍보에 즉각 좌우되는 베스트셀러가 아닌, 오래 묵은 진실한 베스트셀러가 대접받는 점도 헌책방의 매력이다. 언론에서 좋다고 극찬하는 책들은 일반 서점에선 잘 팔리지만 헌책방에선 안 먹힌다고. “공지영은 ‘고등어’ 이전, 이문열은 ‘사람의 아들’ 이전까지만 팔려요. 그 이후 나온 책은 잘 안 나갑니다. 대신 대형서점에서 잘 안 팔리는 이청준이나 이문구, 박상륭 같은 작가의 책이 많이 팔리죠.” 헌책방에서 책을 구하는 이들이 ‘주체적인 독서가’라서 이런 차이가 생긴단다.
먹고사는 문제, 장사는 잘 되나? “어떤 사업이든 그렇겠지만 문 열고 1∼2년은 어려웠는데, 지금은 검소하게 살면 살 수 있어요. 적게 먹고 적게 쓰면 적게 벌어도 되잖아요.” 기자의 애매한 표정을 보더니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경제적 지표로 말씀드리자면, 전 빚이 없어요.”
그가 꿈꾸는 헌책방의 미래는 두 가지다. 우선 한 분야를 특화한 전문 헌책방이 되는 것. “우리나라도 헌책방이 외국처럼 전문 컬렉션을 갖춘 곳으로 변하지 않을까 해요. 해외 셰익스피어 전문 헌책방에선 책은 물론 공연 포스터, 음반 같은 것들도 다 팔죠. 이런 집 주인은 장사꾼이 아니라 그 분야 전문가죠.” 그는 철학, 사회학 분야 전문 헌책방을 운영하는 게 목표다.
또 하나는 서점을 공동체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제 기억으로는 옛날엔 서점 아저씨와 이야기하고 책 추천받는 게 흔했어요. 헌책방들이 추천 도서 리스트 만들어 뿌리기도 하고 그랬어요. 책방은 문화의 보고였어요.” 그가 원하는 서점은 단순히 물건을 사는 곳이 아니라 빈곤한 문화를 채우고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안식처이자 동네 사랑방이다. “책만 사고 휙 나가는 것이 아니라 동네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고, 그러면 좋잖아요. 사람과 책,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었던, 하지만 지금은 끊어져버린 끈을 찾아 잇고 싶어요.” 그래서 책방을 동네 청소년 공부방으로도 제공하고 아이들은 여기서 숙제며 공부를 한다. “여기에다 수학노트나 김치 같은 걸 맡겨놓고 가기도 해요. 정말 재미있죠. 사람 사는 느낌도 물씬 나고.”
주인장이 ‘끊어진 끈’을 다 찾아 이었을 때, 이 동네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궁금해졌다.
서울 종로2가의 대로변. 고은과 박경리, 황석영 등 한국 대표 문인들의 일러스트가 그려진 복도를 따라 지하로 내려가면 밝고 화사한 분위기의 서점이 나온다. 6만권 안팎의 방대한 책이 약 630㎡(약 190평) 크기의 매장 공간을 채우고 있다. 평일인데도 사람들로 북적이고, 오렌지색 앞치마를 두른 점원들이 바쁘게 책을 정리하고 있다. 장르별 분류도 잘 돼 있고, 앉아서 책 읽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도서 검색용 컴퓨터도 눈에 띈다. 이곳은 지난 9월 문을 연 ‘알라딘 종로점’으로 인터넷 서점인 알라딘의 첫 오프라인 매장이다. 그냥 봐선 여느 대형서점과 다를 바 없다. 단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새책이 아닌 헌책을 판다는 것이다.
서오현(39) 점장은 지난 4월부터 헌책방 실무를 도맡았고 결국 점장까지 맡게 됐다. “새책방을 낸다고 했다면 관심이 없었을 텐데 중고서점이라고 해서 관심이 생겼죠. 요새 새로 생기는 헌책방은 거의 없는 데다 새로운 분위기의 헌책방을 만들어보고 싶기도 했고요.”
이곳은 ‘주인 맘대로’가 아니라 매입부터 판매 등 운영 전반이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국내 최초격인 헌책방이다. 주요 타깃 고객은 헌책 마니아가 아닌, 싼 값에 책을 구하려는 일반 대중이다. “애초부터 일반 독자를 위해 최근에 잘 팔리는 책을 공급하는 헌책방을 만들자는 방향이었죠. 그래서 재고도 그런 쪽으로 많이 확보하고 있어요.” 헌책은 매장을 찾은 개인에게서 매입하기도 하지만 주로 인터넷 알라딘에서 확보한 물량을 공급받는다.
입구부터 복도까지 빽빽하게 책이 쌓여 있는 보통 헌책방과 달리 일반 대중이 쉽게 발을 들일 수 있도록 매장 분위기에 신경을 많이 썼다. “밝고 깨끗한 매장이 원칙입니다. 일반 헌책방은 복잡하고 먼지도 많은데, 이런 것을 피하려고 했어요. 또 헌책방은 주인이나 일하는 분들이 책을 기억하지 못하면 찾기가 힘든데, 우리는 최대한 책을 찾기 쉽도록 꾸몄습니다.”
기존 헌책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격 흥정 장면도 없다. 판매량과 책 상태, 출간시기에 따라 데이터베이스가 마련돼 있어 바코드를 찍으면 적정 가격이 바로 나온다. “가격 산출 공식을 만들어놨어요. 판매가 될 책은 좀 더 비싸게라도 사게 됩니다.” 다만 ‘대중적’이다 보니 책 마니아들을 위한 절판된 책이나 아주 오래된 책 등 희귀본은 많지 않다.
시스템을 갖춘 헌책방에 대한 반응은 좋은 편이다. “헌책방 처음 와본다는 분들이 책이 깨끗하고 많다면서 만족합니다. 반응이 좋은 것 같아요.” 그럼 장사는 잘 될까? “아직 초기 단계라 잘 된다고는 말씀드릴 수는 없네요. 한권 팔아봐야 1000원도 안 남는 경우가 많아서요. 손익분기점을 넘긴 건 아니지만 운영비 정도는 벌고 있습니다.”
한 가지 의문. 알라딘은 인터넷을 통해 엄연히 새책을 팔고 있음에도 헌책방을 새로 냈다. 새책과 헌책은 보완재가 아니라 대체재다. 헌책을 팔면 새책 판매가 줄지 않을까? “선순환 구조에요. 중고책이 유통되면 새책 사는 인구도 늘어납니다. 집에 꽂아둔 책을 팔아서 그 돈으로 또 새 책을 사보는 것이죠. 그럼 일반 서점의 매출에 도움이 되겠죠. 반면 헌책 사는 사람들은 싸게 살 수 있으니까, 헌책 보는 사람들이 늘면 전체 독서인구가 늘어날 수 있고 출판 시장도 좋아지겠죠.” 서 점장은 강조했다. “책은 집안에 장식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순환하는 것입니다.”
체계적인 대형 헌책방의 목표는 ‘아주 오랫동안’ 매장을 운영하는 것이다. “종로는 다니는 사람이 많은데 지나가면서 가볍게 들러 책 한 권 사서 볼 수 있는, 좋은 책을 쉽고 저렴하게 살 수 있는 곳이 되고 싶어요. ‘종로에 서점이 있는데 중고책 서점이래. 좋은 책을 싸게 판대’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인터뷰를 하기 직전까지 직원들과 회의를 진행했던 서 점장은 인터뷰 중에도 수첩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태어난 지 갓 두 달된 헌책방은 넓었고, 할 일은 많았다.
김도훈 기자 kinch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