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담아 관객과 通하다… 상복 터진 ‘고지전’ 장훈 감독
입력 2011-11-17 18:08
지난여름 개봉된 영화 ‘고지전’이 국내 주요 영화제에서 잇따라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며 올해 최고의 영화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휴전 직전 뺏고 빼앗기는 고지쟁탈전을 통해 한국 전쟁의 참상을 그려낸 ‘고지전’은 올해 부일영화제, 대종상영화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모두 최우수작품상을 포함, 4관왕에 올랐다. 오는 25일 열리는 청룡영화제에도 가장 많은 11개 부문에 후보로 이름을 올렸고, 내년 2월 열리는 아카데미영화제에도 외국어 영화 부문에 한국 대표로 출품됐다.
흥행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작품성 면에서는 올해 최고의 영화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성적표다. 지난 14일 서울 광화문 인근 카페에서 영화를 연출한 장훈(36) 감독을 만났다.
-‘고지전’이 이렇게 인정을 받고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우리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을 진지하게 바라보려고 했던 시도가 평가를 받은 것 같다. 한반도는 지금도 휴전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연출 제의를 거절하기 위해 시나리오를 읽었다고 하던데, 그게 무슨 말인가.
“쇼박스로부터 연출 제의를 받은 건 ‘의형제’ 후반작업을 할 무렵이었다. 너무 바쁘고 피곤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전쟁 영화는 한 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일단 하면 고생도 많고, 준비도 많이 해야 한다. 나이가 들고 영화적으로 내공이 쌓였을 때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나리오라도 읽어보고 거절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결국 연출을 수락했는데.
“시나리오가 너무 좋았다. 읽는 2시간 동안에 쉬고 싶다는 생각이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도 그런 시나리오를 받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놓치기엔 너무나 아까웠다.”
-‘태극기 휘날리며’도 그랬지만, ‘고지전’은 남과 북을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그리지 않고 있다. 원치않는 전쟁에 휩쓸려들어가 허물어지는 민초들에 초점을 맞췄는데.
“그 점에서 시나리오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박상연 작가의 시각에 동의한다.”
-작품성은 인정받았지만 흥행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지전’은 순제작비만 110억원이 들어갔기 때문에 450만 관객이 들어야 손익분기점을 넘어서는데 294만9000명에 그쳤다).
“상업적인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많다. 너무 진지하게 접근해서 관객들이 부담을 가졌던 게 아닌가 싶다. 대작 영화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경쟁도 심했다. 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해 자기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 부문에 출품됐는데 목표는 수상인가(아카데미 외국어 영화 부문에는 국가별로 한 작품만 출품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영화진흥위 심사를 거쳐 ‘고지전’이 선정됐다).
“한국영화는 아카데미에 후보로도 오른 적이 없다. 정말 의외다. 상을 받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지만 후보에라도 올랐으면 좋겠다.”
-다음 작품 준비하고 있는 게 있나.
“요즘은 쉬고 있다. 그동안 충전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쇼박스와 다음 작품도 함께 하기로 했는데 사실 ‘고지전’이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해 면목이 없다.”
-담아내고 싶은 작품 세계가 있나.
“오락적으로 재미도 있어야겠지만 이 시대에 위안이 되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작품인지를 고민한다. 어떤 얘기를 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중요한 것 같다. 관객들과 잘 소통할 수 있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늘 고민하는 게 영화 만드는 모든 사람들의 숙명이다.”
-영화 개봉 시기에 즈음해 스승인 김기덕 감독과의 불편한 관계가 화제였다. 당시엔 말을 아꼈는데.
“당시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내가 그에 대해 뭐라 얘기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김기덕) 감독님의 제자로 영화를 시작했기 때문에 상황이 스승님의 뜻대로 정리되는 게 옳다고 봤다. 감독님과 헤어지게 된 과정에서 분명히 제가 잘못한 부분이 있다.”
-그건 무슨 말인가.
“그 당시 저는 감독님 곁을 떠난다는 생각도 안 했었고, 실제 내가 떠나는 줄도 몰랐다. 감독님은 저에게 너무 큰 스승이고 존경하는 어려운 상대였다. 그러다보니 ‘의형제’를 찍게 되는 과정을 감독님께 편하게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제가 감독님을 떠난 걸 알게 됐고, 그게 감독님에게 얼마나 큰 상처였는지 알게 됐다.”
-관계 회복은 불가능한가.
“저로 인해 힘들었을 감독님께 죄송스럽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다른 좋은 관계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장 감독은 서울대 미대 시각디자인학과를 졸업한 후 영화가 하고 싶어 무작정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김 감독 밑에서 연출부·조감독을 거쳤으며 김 감독이 제작·각본 등을 맡은 ‘영화는 영화다’(2008)로 장편 데뷔했다. 그러나 그후 김 감독 곁을 떠나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 ‘의형제’(2010)를 연출, 흥행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장 감독은 최근 영평상 시상식에서 “영원한 스승이신 김 감독님께 수상 영광을 돌리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라동철 선임기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