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동화속 세상 고혹적인 알프스의 유혹… 스위스 남부 발레州를 가다
입력 2011-11-16 15:32
알프스의 고봉준령과 에메랄드빛 영롱한 호수, 하얀 눈과 푸른 초원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스위스. 소떼와 양떼가 유유히 풀을 뜯는 산촌 마을과 교회가 어우러져 사계절 풍경화를 그려내는 곳. 협곡을 달려온 산악열차가 하늘과 맞닿은 설산을 거미줄처럼 누비는 곳. 스위스 최고의 청정지대인 남부 발레의 풍경들이다.
◇친환경 도시 체르마트= 체르마트는 해발 4478m의 마테호른을 랜드마크로 하는 알프스의 심장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리조트 마을이다. 400㎞가 넘는 하이킹 코스와 스위스 최장의 스키 슬로프를 갖추고 있어 연중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청정지역 발레에서도 환경을 가장 중시하는 곳으로 전기자동차 외에는 차량 출입을 금하고 있다.
비스프를 출발한 열차는 구름이 산 중턱까지 드리운 낭만적인 산촌을 끼고 달린다. 차창 밖으로 한국의 전방에서나 볼 수 있는 탱크저지선 같은 비좁은 암벽이 흐른다. 마을 가옥은 특유의 목조주택으로 지붕은 폭설에 대비해 삼겹살 불판 같은 납작한 돌을 얹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살았던 곳이 바로 이런 곳이리라.
체르마트역에 도착하자 해발 3089m 높이의 알프스 봉우리 고르너그라트가 손짓한다. 보통 등산열차를 타고 오르지만 8인승 고속 케이블카로 오르기도 한다. 케이블카 역에는 이른 아침부터 스키어들로 빼곡하다. 중간역 리펠알프를 거친 케이블카는 수만 년 전 빙하의 세월을 거슬러 오른다.
하류 지역이 지구의 젊은 피부라면, 상류는 더 모진 풍상을 맞았는지 주름의 골이 깊고 넓다. 전망대 입구에 들어서자 고도를 알리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해발 3000m가 넘는 고산지대라 가만히 서있어도 숨이 가쁘다. 유럽의 가장 높은 레스토랑에서 눈 덮인 고봉들을 감상하며 식사를 즐기는 운치가 그만이다.
중간역 푸리에서 대형 곤돌라로 갈아타면 해발 3883m 높이의 마테호른 글래시어 파라다이스에 닿는다. 작은 마테호른으로 불리는 이곳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로 만년설과 빙하는 물론 프랑스·이탈리아·스위스에 걸쳐있는 4000m가 넘는 38개의 거대한 알프스 봉우리들을 조망할 수 있다. 전망대 옆에는 알프스 최고 지점에 위치한 빙하동굴이 있다. 빙하 표면에서 15m 하단에 만들어진 얼음궁전 안에는 다양한 얼음 조각과 조명이 나그네들을 맞는다.
산을 내려와 시내에 들어서면 체르마트박물관이 기다린다. 이 박물관은 마테호른의 등반사를 보여주는 유물과 스위스의 역사 자료 등을 갖춘 곳으로 규모에 비해 볼거리가 많은 편이다.
첫 등정 때 마테호른을 목전에 두고도 심한 눈보라 때문에 발길을 돌렸다가 이틀 후 다시 찾았다. 그토록 애태웠던 바위산은 마침내 눈과 얼음으로 거칠게 치장한 채 삼각뿔 모양의 장엄한 모습을 드러낸다. 얼음과 만년설로 뒤덮인 마테호른이 거울 같은 호수에 거꾸로 비친 반영이 데칼코마니 기법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이토록 장엄한 매력 때문에 파라마운트 영화사가 마테호른을 로고로 사용하는가 보다.
◇휴양의 도시 로이커바드= 비스프를 거쳐 로이크역에서 버스로 30여분 굽이굽이 산등성이를 오른다. 차창 아래 마을 저편은 버스가 케이블카로 느껴질 만큼 가파른 낭떠러지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 있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언덕에서 유유히 풀을 뜯는 소떼가 나타난다. 전율의 연속이다.
30여개의 온천장을 갖춘 로이커바드는 유럽 고산지대 온천 중 가장 큰 규모로 칼슘과 유황이 풍부한 온천수는 치료와 미용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깊은 산중에서 수려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야외 온천욕을 하는 등 다양한 스파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로마시대부터 겜미산 고개를 왕래하는 사람들의 피로를 풀어주던 유서 깊은 온천은 괴테와 모파상 등 유명 작가들도 즐겨 찾았던 곳.
마을 중심지에 위치한 린드너호텔 스파센터 알펜테롬은 다양한 실내온천과 노천탕을 갖추고 있다. 눈 내리는 노천탕에 몸을 맡긴 후 코끝이 시릴 즈음 사우나에서 몸을 녹이면 낙원이 따로 없다. 이곳은 스위스 올림픽대표팀의 치료센터로도 유명하다. 10개의 스파 공간을 갖춘 유럽 최대의 알프스 온천 부르거바트는 미네랄이 풍부하고 안락한 시설을 갖춰 가족 여행에 제격이다.
이곳에서 도보로 10여분을 이동하면 케이블카를 타고 겜미산에 오를 수 있다. 겜미산은 여름엔 알프스 야생화가 흐드러진 꽃밭 하이킹이, 겨울엔 썰매를 비롯한 크로스컨트리가 인기다. 로이커바드의 하산 길은 안개구름과 쪽빛 하늘, 수려한 산림이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한다.
이른 아침 버스 안은 비경을 담으려는 이방인들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함께 탄 승객들도 자신들은 개의치 말라는 표정들이다. 버스기사는 아예 목 좋은 곳에 정차해 주며 사진을 찍으란다. 아름다운 자연 앞에선 인심도 넉넉해지는 법이다.
◇빙하의 도시 리더알프= 리더알프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23㎞ 길이의 알레취빙하를 만나는 길목이다. 뫼렐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45도가 넘는 급경사를 올라야 도달할 수 있는 고산지대로 이곳에서도 체르마트와 같이 휘발유 차량은 진입이 금지돼 있다.
스위스의 전형적인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리더알프는 아름다운 마을로 석양에 물드는 고즈넉한 설경이 캘린더나 엽서로 보는 스위스 그대로다. 서편 저 멀리 마테호른도 눈에 들어온다. 모스플루 또는 호플루까지 케이블카나 좌식리프트를 타고 오르면 알레취빙하를 바라보며 숲 속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눈이 무릎까지 쌓인 인적 하나 없는 알레취숲을 거닐다 보면 세상 잡념은 다 지워지고 머릿속도 순백으로 채색된다.
◇포도의 도시 시옹= 시옹은 스위스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발레의 주도(州都)답게 구시가지는 중세 유적들이 즐비하다. 도시 언덕 위에 위치한 2개의 고성이 대표적 상징물로 그 중 14세기에 제작된 발레르성의 파이프오르간은 연주가 가능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악기로 유명하다.
시옹은 스위스 최대의 와인 생산지로 산등성이마다 포도밭이 테라스처럼 펼쳐져 있다. 포도밭을 따라 조성된 수로가 발레 주에만 1800㎞에 이르는데 하이킹 코스로 인기 높다. 이곳에선 고지대까지 물 확보가 어려워 로마시대부터 빙하가 녹아내리는 물을 포도 재배에 이용하고 있다.
비세 드 클라바우에서 와이너리로 이어지는 언덕을 따라 펼쳐진 수로에는 석회 성분의 뿌연 빙하수가 넘쳐난다. 스위스 와인은 생산량도 적지만 전량 자국에서 소비돼 외국에선 맛보기조차 힘들다. 스위스 특산품 치즈 요리와 말린 고기류를 함께 곁들이면 일품이다.
시옹(스위스)=글·사진 박철화 기자 ch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