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환의 삶과 신앙] 흐르는 강물처럼
입력 2011-11-16 18:05
지난 주말 로버트 레드퍼드가 감독을 맡아 직접 제작한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이란 영화를 다시 보았다. 언제나 긴 여운을 남기는 그 영화. 황홀하게 아름다운 강을 낀 몬태나의 풍광이 스토리를 압도하는 감이 없지 않지만 한 가족의 이야기, 우리네 삶의 이야기가 여울목을 돌고 휘돌 목도 돌지만 결국은 모든 것을 녹여 조용한 강물처럼 흘러간다는 주제가 너무 감동적이다.
특히 자신의 자전적 스토리를 소설로 집필한, 시카고 대학에서 은퇴한 영문학자이며 작가였던 노먼 매클레인의 마지막 독백이 인상적이다. “동생 폴은 빅 블랙풋 강둑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법칙을 초월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예술작품 같았다. 어슴푸레한 계곡에 홀로 있을 때면 모든 존재가 내 영혼과 기억, 그리고 강의 소리, 낚싯대를 던지는 4박자 리듬, 고기가 물리길 바라는 희망과 함께 모두 하나의 존재로 어렴풋해지는 것 같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로 녹아든다. 그리고 강이 그것을 통해 흐른다. (A river runs through it)…어떤 바위에는 영겁의 빗방울이 머물고, 또 그 바위 밑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서 그 말씀이 곧 그들의 역사가 된다. …나는 그 강물에 넋을 잃고 말았다.”
모든 만남과 삶의 단편들을 시간이란 강물에 흘려보내고 이제는 혼자 외롭게 고향땅 빅 블랙풋 강에서 낚시를 하는 할아버지 노먼의 마지막 내레이션. 생의 길을 걸으며 마주쳤던 삶의 파편들도, 가슴 저리게 아픈 이야기들도 세월의 강물에 몸을 담그고 흐르는 강물을 보니 이제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껴안고, 아픔을 주었던 기억들조차 낚싯줄을 던지는 박자처럼 하나님의 은총의 박자였다는 것을 깨달으며,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사랑하려 노력했던 자신의 삶. 모든 것을 초월한 한 인간이 흐르는 강물과 하나 되어 서 있는 마지막 영상이 벅찬 감동으로 내 가슴을 울렸다.
지난 주일 오후 지인들과 함께 억새축제가 한창인 난지도 한강공원을 가볼 여유를 가졌다.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를 떠올리며 억새소리를 원 없이 듣고,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오랫동안 눌리고 묵혔던 가슴이 조금이나마 위로받고 내려놓는 듯 시원함을 가질 수 있었다. 깊은 강은 조용히 흐른다던가. 말없이 조용히 흐르는 한강수를 보며 우리네 삶의 사연들도 가슴속 멍울들도 이렇게 지나가겠지. 저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를 싣고, 우리네 이야기와 상처와 희망을 품고, 깊고 푸른 강물을 이루며 저 우주의 바다로 흘러가겠지. 말없이 흐르는 강물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감사의 계절에 고맙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강의 물길을 보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은총의 박자이리라. 아, 나는 한강수를 보며 그 말없는 소리를 들으며 그 강물에 넋을 잃고 말았다.
강물이 우리에게 주는 소리를
더 오래 듣고 있어야 했다
강물이 흘러 아래로 가는 뜻을
다 아는 듯 성급하게 전하러 다니기 전에
가르치려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게 강물의 힘줄이건 멈추지 않는 빛깔이건
오히려 물줄기 만날 때마다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먼저 생각해야 했다
흘러가며 반짝이는 풀과 꽃들 만날 때마다
꽃으로 열매로 올라가려 기를 쓰지 말고
뿌리 쪽으로 소리 없이 내려가야 했다
어디서 이 실패는 비롯되었는가 골똘해지기 전에
조금 고였다 싶으면 서둘러 바다로
이끌고 가려 한 건 잘못이었다
고여 넘쳐 저절로 흐름을 찾아갈 때까지
한사리 가득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도종환의 시 ‘강가에서’)
■ 정석환 교수는 이야기심리학을 통해 보는 성인 발달과 목회상담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현재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장 겸 연합신학대학원장을 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