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위기 美·유럽 “조세피난처로 새는 돈 막아라”
입력 2011-11-15 22:53
각국, 역외 탈세 근절로 부채 줄이기 안간힘
채무위기에 시달리고 있는 미국과 유럽 정부가 빈 곳간을 채우기 위해 세금 추적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부자들에게 짐을 지우는 ‘증세안’이나 국민들의 허리를 졸라매게 하는 ‘긴축안’보다는 조세피난처를 이용한 역외 탈세자나 지하경제 활동에 대한 추징이 부채 해결에 효과적이라는 판단에서다. 뉴욕타임스(NYT)는 비정부기관인 ‘조세정의네트워크’의 자료를 인용해 “전 세계적으로 조세 회피 개인 자산이 6년 전에 비해 배로 늘어난 11조50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분석했다.
◇“새는 돈 막아라”=미국은 해외로 빼돌린 자금 때문에 연간 1000억 달러의 세수 손실을 입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정난에 허덕이던 미국 정부의 총구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검은 돈의 은닉처’ 스위스다. 미 국세청은 2009년부터 미 부유층들이 수백억 달러 규모의 탈세 자금을 스위스 최대은행인 UBS의 계좌에 유치했을 것으로 보고 이 은행을 압박해 명단 공개를 요구했다. 국세청은 미국 시민권자들의 탈세를 지원한 혐의로 UBS를 기소해 ‘미국 내 영업 계속’을 조건으로 7억8000만 달러의 벌금을 징수하기도 했다. UBS는 지난해 6월 고객 500명의 이름을 넘기는 등 단계적으로 총 4450여명의 명단 인계를 시작했다. 이 조치로 인해 스위스 민간은행에 예치된 미국계 자금은 2007년 전체의 18%에서 지난해 2%로 감소했다. 스위스 제2 은행인 크레디트스위스도 최근 탈세 혐의가 있는 미국인 고객 130명의 이름과 계좌 내역 등 정보를 스위스 연방 조세국에 통보했다. 일요신문 존탁스차이퉁에 따르면 미 국세청에 이첩될 관련 문건에는 크레디트스위스와 자회사인 프라이빗뱅크 클라리덴 로이에 역외 계좌를 갖고 있는 미국인들의 명단이 들어 있다. 미 당국은 현재 크레디트스위스를 포함한 11개 스위스 은행을 대상으로 수사를 진행 중이다.
또 미국은 해외에 예치된 자금들을 국내로 반환시키기 위해 세금을 일부 감면해 주는 특별법 제정을 의회에서 논의 중이다. 미국 기업들의 해외 보유금은 지난 6월말 현재 1조200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사 과정에서 탈세 여부가 드러나면 추징 금액은 배가된다.
◇유럽도 팔 걷었다=독일 정부는 지난 4월 스위스의 유명 프라이빗뱅크(PB) 율리우스배르로부터 5000만 유로를 합의금 명목으로 받았다. 조세회피자들의 자금을 비밀리에 유치했다는 혐의와 관련된 것이었다. 국가 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130%에 가까운 이탈리아는 지난해 국내 은행들에 조세피난처인 산마리노의 자금 세탁 전문은행들과의 거래를 끊을 것을 종용, 유출 자금 35%가 줄었다. 영국과 독일은 스위스와 조세협약을 맺고 은행에 숨겨진 자금들에 대한 세금 추징에 들어갔다.
유럽에서는 지하경제에 대한 세금만 제대로 거둬도 재정문제에 돌파구가 마련될 것으로 NYT는 예측했다. 오스트리아 요하네스 케플러 대학의 프리드리히 슈나이더 교수는 “유럽 31개국의 지하경제가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19.3%에 달한다”고 말했다. 특히 재정불량국은 더욱 심각했다. 지하경제 규모는 그리스의 경우 GDP 대비 24.3%, 이탈리아 21.2%, 스페인 19.2%를 차지했다.
지난 5년간 탈루 세금이 500억 유로가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리스 정부는 총 30억 유로의 세금을 회피한 6000곳 기업의 이름을 공개, 세금 납부를 압박했다. 또한 영수증 발급 의무화 등을 통한 탈세 관행 근절을 선언했다. 이탈리아는 2500유로 이상 거래 시 신용카드로 결제하거나 은행이 발급한 서류를 첨부하도록 했다. 영국은 9억 유로를 들여 도입한 시스템을 통해 연간 10억 유로의 세금을 더 걷을 것으로 내다봤다. 또한 특별세무조사팀을 꾸려 부자들이 세금을 탈루하는지 조사하고 있다. 런던의 한 회계사가 “수개월에 한 번 받을 세금 독촉장을 최근 주당 2∼3개씩 받았다”고 말할 정도다.
◇효과는 ‘글쎄’=지난 3∼4일 프랑스 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도 조세피난처 문제에 대한 진전이 있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직접 은행 비밀주의를 고수하는 11개 국가를 거론하면서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탈세를 막기 위한 국가 간 조세 협력도 강화키로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해 20개국과 협력해 조세회피지역 블랙리스트를 선정, 190억 달러를 추징했다. 하지만 조세피난처를 이용한 탈세 근절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보잉과 씨티그룹 등의 조세회피를 다룬 책인 ‘보물섬’의 저자 니콜라스 색슨은 “세법상 구멍은 막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가장 큰 이유는 국내에서 벌어지는 탈루행위는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으나 역외 탈세는 국가공조, 정보 수집이 어렵고 해외투자로 탈바꿈하는 등 교묘히 위장하는 경우가 많아 조사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해외 거주 탈세자들의 비협조로 조사에 한계가 있다.
게다가 세금 부과 이후 해외재산 환수도 문제다. 외국과 맺은 조세협약상 징수협정이 미비하고 외국 당국의 반대 시 실질적인 징세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Key Word : 조세피난처
각국의 조세회피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세금이 전혀 없거나 매우 적게 부과하는 국가나 지역. 중남미 카리브해 도서와 태평양 연안 섬나라, 유럽 소국들에 집중적으로 분포돼 있다. 이곳에 페이퍼컴퍼니(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를 세워 탈세에 이용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00년(35개국)과 2002년(7개국) 조세피난처를 지정해 발표한 바 있으나 이후 이를 폐기한 뒤 국가별로 ‘조세정보 공유 기준 이행 여부’를 공개하고 있다.
◇Key Word : 지하경제
과세의 대상이나 정부의 규제로부터 피하기 위해 합법적·비합법적 수단이 동원돼 이뤄지는 숨은 경제. 마약 매매나 매춘, 사채, 부동산 투기 등이 포함된다.
김아진 기자 ahjin8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