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공열 (8) 절망 속 아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나님
입력 2011-11-15 17:37
매년 5월엔 전국소년체육대회가, 10월엔 전국체육대회가 개최된다. 그래서 봄과 가을이 되면 나는 1980년대에 이들 대회의 의전홍보물 설치 사업을 수주하러 동분서주했던 날들을 자연스럽게 회상하게 된다. 경기장 주변을 빼곡히 둘러쌓고 있는 홍보물들…. 76년부터 80년쯤, 나는 그 의전홍보물들로 인해 울고 웃었다.
내가 의전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처음으로 비중 있게 진행한 대회는 강원도 춘천시와 원주시에서 개최됐던 제9회 전국소년체육대회다. 대회의 모든 옥외홍보물을 수주하진 않았고 부분적으로 참여한 대회지만, 잊을 수 없는 대회로 남아있다. 일의 양이 가장 많았을 뿐 아니라 참여업체 가운데 가장 우수하게 일을 해 냈기 때문이다.
도청주관으로 개최됐던 의전사업은 당시 기업의 지원에 의존해 진행됐다. 대회 홍보를 위한 예산이 풍족하지 않아서 탑, 플래카드, 아치 등 옥외홍보물은 기업체로부터 현물 기증을 받는 식으로 충당했기 때문이다, 대신 도청은 기업을 위해 자그마한 광고를 양 기둥에 표현할 수 있도록 해줬다.
제9회 전국소년체육대회는 결혼 이후 6년간 빚에 시달리던 내게 가족을 부양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준 대회였다. 하지만 그 희망도 잠시, 5·18 광주민주화 항쟁이 발발해 대회는 여지없이 무기한 연기됐다. 5월초쯤 개막을 앞둔 터라 나는 대회준비위원회에 약속한 물량을 맞추기 위해 이미 이곳저곳에서 4000만원의 자금을 끌어 모았고, 광고물의 제작 및 설치도 완료한 상태였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아름드리 나무를 뽑을 정도의 위력을 가진 태풍 셀마로 설치된 광고물 하나가 쓰러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원주역 근처에 있던 가로수가 태풍으로 뿌리째 뽑히면서 설치한 5단 아치형 광고물을 덮친 게 화근이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이는 내가 설치한 가장 크고 웅장한 홍보물이었기에 당시 400만원 정도의 금전적 피해를 입었다.
대회 시작 전에 이러한 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조금씩 자신감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것만 성공하면 될 것 같은데’란 생각으로 애통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 일 뿐이었다.
‘하나님! 제가 이 세상에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엔 아직도 덜 빚어진 진흙입니까? 혹시 아직도 내 자신을 낮추지 못해 인간의 꾀로 해결하려고만 한 것은 아닌지요.’ 나는 교회 새벽예배와 철야예배에 나가 이 같은 내용으로 오랜 시간 울며 기도했다. 그렇게 며칠을 기도하니 나를 짓누르던 조급함은 사라지고 사업결과의 호불호와 상관없이 마음에 평안함이 깃들었다.
그런데 한 달 뒤, 태풍이 지나가고 광주 민주화항쟁으로 무기한 연기됐던 대회가 기적적으로 개최됐다. 이로써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의지할 곳은 오직 주님뿐이라는 확신을 다시 한번 갖게 됐다. 나는 이를 바탕으로 다른 사업을 수주할 때도 상황과 결과에 관계없이 주님께 감사하며 일할 수 있었다. 같은 해 10월에도 나는 전북에서 열린 전국체육대회의 옥외홍보물 설치를 맡게 됐다. 도청에서 5월 광주 전국소년체육대회의 결과를 보고 내게 맡겨준 것이다. 지금도 나는 5월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낙담하고 절망했다면 제2, 제3의 기회는 오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주님께서 절망 속에서 당신을 찾는 아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큰 뜻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빚으실 것이라는 믿음은 차후에도 내게 큰 의지가 되고 힘이 됐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