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손수호] ‘난중일기’
입력 2011-11-14 17:48
시골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작은 상을 하나 받았는데, 집에 가서 부상을 뜯어 보니 ‘난중일기’ 책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읽었으나 도대체 재미가 없었다. 중학교에 가니 ‘성웅 이순신’을 교육하길래 다시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상급학교에 진학해 자취방과 하숙방을 전전하는 동안 책은 사라진 대신 그 무미건조한 문체가 오래 기억된다.
작가 김훈은 “대학 2학년 때 도서관에서 처음 읽은 난중일기가 내 젊은 영혼을 뒤흔들었다”고 전한다. 그리고는 37년이 지난 뒤 돌연 연필을 들어 그 책을 원전으로 한 ‘칼의 노래’를 쓰기에 이른다. 소설가 김탁환의 ‘불멸의 이순신’이나 저술가 박종평의 ‘그는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 모두 난중일기에 바탕을 둔 2차적 저작물이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7년의 체험을 적은 글은 처음에 ‘임진일기’ ‘계사일기’ 식으로 간지가 붙어 있었으나 정조 19년(1795)에 유득공 주도로 ‘이충무공전서’를 펴낼 때 난중일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지금 전하는 일기는 이순신이 직접 쓴 초서체 일기와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해서체 일기가 있다. 두 기록물 사이의 차이는 전서 편집자가 책을 만들 때 첨삭을 했기 때문이다.
난중일기의 특징은 질질 끄는 문인 혹은 선비의 글과 달리 문장이 간결하면서도 내용은 방대하다는 것이다. 전란의 진행과 전략전술, 무기 개발, 조정과 동료 무인들의 처신, 개고기와 연포탕 등 진중음식에 이르기까지 백과사전에 버금가는 기록을 담고 있다. 개인의 일기이자 전쟁사, 생활사를 담은 소중한 유산인 것이다. 여기에다 글씨도 명필에 가까워 최상급의 가치를 지녔으니 국보 76호로 지정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난중일기’가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 대상으로 확정됐다고 한다. 역사적 사실과 학술연구 성과 등이 검증됐고, 전쟁 중 지휘관이 직접 기록물을 남긴 사례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 신청 이유다. 등재는 2013년 6월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에서 결정된다.
뉴스를 읽으니 어릴 때 만났던 난중일기가 떠올랐다. 책은 누런 종이에 인쇄됐고 고동색 비닐 표지에 싸여 있었다. 보랏빛 잉크로 월계수 잎사귀 속에 찍혀있던 ‘賞’자도 그립다. 모름지기 책은 읽어야 할 때가 있거늘, 너무 일찍 접해 아쉬운 난중일기의 1970년 판본을 찾아 고서점을 돌아봐야겠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