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공열 (7) 첫 사업 참담한 실패… “기도가 부족한 탓일까?”

입력 2011-11-14 10:24


결혼을 했지만 어려워진 사업은 새로운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영화나 TV에선 극중인물이 결혼을 하면 책임감을 갖고 더 열심히 사회생활을 해 모든 일들이 잘 해결되던데 내게는 그런 일이 멀게만 느껴졌다. 결혼 직후부터 악재의 연속이었다. 1973년 에너지파동으로 내 전문분야인 네온사인을 더 이상 제작할 수 없게 됐다. 이러한 경기 탓에 기업들은 제일 먼저 홍보 예산을 삭감했다.

가장이 됐다는 책임감에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정신없이 사업거리를 찾아 다녔다. 하지만 그때마다 좌절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계태권도대회 옥외홍보물 입찰공고를 보게 됐고 나는 이 건을 수주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요즘은 선수금-중도금-잔금형식으로 계약이 이뤄지나, 당시만 해도 옥외광고물 수주는 먼저 투자해 시설물을 설치한 뒤 대회가 끝나고 투자자금과 마진을 회수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 사업을 꼭 수주하고 싶었던 나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을 찾았다. 하지만 은행의 높은 문을 실감했을 뿐 원하던 결과는 얻지 못했다.

결국 결혼하자마자 처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사업 준비를 했다. 보통 타인의 자금으로 사업을 시작하면 두려움이 앞서는 게 인지상정이나 당시 나는 자신만만했다. ‘이 건만 잘 해결하면 그간의 실패를 만회하고 일어설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하청받아 설치하게 된 옥외 광고물이 쓰러져 광고물 대금 일부를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는 내 경험 부족으로 빚어진 결과였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 보였다. 집에 돌아가 아내를 볼 자신이 없었다.

‘내 기도가 부족한 걸까? 왜 주님께서는 아직도 내게 물질적인 축복을 주기엔 시기상조라고 생각하시는 걸까.’

당시 나는 연속되는 시련으로 마음속으로 주님을 많이 원망했던 것 같다. 사업실패 후 나는 아내에게 귀향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시집와 고생만 했던 아내에게 암담하고 믿기 어려운 현실로 다가왔을 것이다. 아마도 내게 시집온 것을 수 없이 후회했으리라. 게다가 아내는 나와 달리 믿는 가정에서 자란 사람도 아니지 않은가. 그간 아내는 힘든 상황에서 신앙의 힘보단 인간적인 방법으로 어려움을 해결하려 하곤 했다.

하지만 이때 아내는 ‘다시 한번 주님께 매달려보자’고 제안했다. 태어날 아이들에게는 우리와 같은 환경을 물려주지 말아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또한 ‘그렇게 하고도 변화가 없다면, 그때 귀향을 해도 늦지 않다’며 ‘다시 한번 힘을 내 보자’고 권유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했던가. 내 신앙보다 연약하다고 생각했던 아내의 조언에 믿음 없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려운 가정에 시집와서 힘들어하는 가장을 보는 게 슬프고 암담했을 텐데 다시 한번 힘을 내자니….

어려움이 지속되는 가운데 74년 첫 아들 규만이가 태어났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첫 열매였다. 보통사람에게는 분명 무엇보다 기쁜 일일 것이다. 나 역시 기뻤다. 하지만 내 형편에는 설상가상이라는 말이 더욱 어울렸다. 아내의 조언대로 귀향을 포기한 우리 부부는 살고 있던 아현동을 떠나 당시 서울에서 가장 낙후되었던 잠원동으로 새 둥지를 틀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주일마다 잠실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바로 지금까지 내가 출석하는 늘푸른교회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