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의 시편] 개혁의 두 날개, 공의와 사랑
입력 2011-11-14 17:44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잡힌 한 여인이 나온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모세의 율법을 들먹이면서 예수님을 시험한다. 이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다. 여자가 음행한 것은 엄연히 드러난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그 여인을 불쌍히 보셨다. 동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감추고 있는 음행의 또 다른 사실을 지적하셨다. 드러나 있는 사실에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더하여 보니까 진실에 더 가까워졌다.
예수님의 교훈은 큰 깨달음을 준다. 우리는 명확한 사실이나 사건에 대해서도 안타까운 사랑의 스펙트럼을 통해 조명하고 재해석해야 한다. 그럴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충동적, 파괴적 사실이 아닌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의 진실을 추구할 수 있다. 최근에 미국 시애틀 연합집회를 인도하면서 보잉사를 방문하여 최신형 보잉 787 비행기를 제작하는 것을 보았다. 규모가 어마어마하였다. 그러나 그 큰 비행기 동체도 두 날개가 있기에 양력과 부력의 힘으로 창공을 날아오른다. 날개가 하나만 있으면 추락하고 만다.
오늘날 교회 개혁도 마찬가지다. 사랑과 공의, 두 날개가 같이 가야 한다. 어느 한쪽만 있으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추락한다. 노아의 세 아들을 생각해보라. 노아가 술에 취해 하체를 벌거벗었다. 그런데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마구 까발렸다. 어쩌면 함은 정의감에 불타올라 아버지의 허물을 지적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허물을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조용하게 겉옷을 가져다가 하체를 덮었다. 누가 봐도 노아의 허물과 실수였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사랑의 옷자락으로 아버지의 허물을 덮었다. 그래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이 아닌가(벧전 4:8).
그러므로 교회 개혁은 항상 공의와 사랑이 함께 있어야 한다. 비록 그것이 객관적 사실이고 옳다고 할지라도 그 사실로 인하여 사람을 해치고 죽이는 일이라면 사랑으로 덮고 공동체 안에서 이해와 수용이 될 만한 분위기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더구나 겉으로는 개혁을 표방하지만 내 안에 욕망의 바벨탑을 쌓고 있다면 그것은 더 개혁이 될 수 없다. 또한 사랑이 없는 공의만으로는 독선과 아집에 빠질 수 있다. 물론 공의가 없는 사랑도 거짓과 위선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언제나 공의와 사랑을 함께 추구해야 한다. 무사 백동수라는 드라마에서도 무사의 칼에는 뜨거운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날선 검처럼 예리하면서, 동시에 뜨거운 심장과 눈물이 스며있는 개혁이 필요한 때다. 그럴 때 서로를 파괴하고 죽이는 개혁이 아닌, 화해와 용서, 진정한 상생의 개혁을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용인 새에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