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원 목사의 행복칼럼 ...자녀를 부모에게 맡기신 이유

입력 2011-11-14 11:04

<송길원 목사의 행복 칼럼> 행복in-행복人-행복印(33)

자녀를 부모에게 맡기신 이유

해리 챠핀의(Harry Chapin)의 이런 시가 있다.

“어느 날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나는 그 때 너무도 바쁜 나날들을 보내야 했단다./ 내가 집을 떠나 있을 때 넌 걷기를 배웠다./ 그리고 더 자라서는/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더구나./ 너는 말했다. ‘아빠, 난 아빠처럼 될테야.’ ‘아빠처럼 되고 싶어요.’ ‘그런데 언제 집에 돌아오세요 아빠?’/ ‘잘 모르겠다. 집에 돌아오면 함께 놀아주마.// 그 때 재미있게 놀자.‘ / 나는 오래 전에 퇴직했고 아들은 분가했다./ 어느 날 나는 아들에게 전화했다./ ‘괜찮다면 네 얼굴이라도 보고 싶구나.’

‘그럴 시간이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어요. 하지만 전화 주셔서 감사해요. 안녕히 계세요. 아버지.‘

나는 수화기를 힘없이 내려놨다.

“내가 네게 한 대로 하는 것을 보니 넌 너무도 날 닮은 모습으로 자랐구나. 날 쏙 빼닮았어.”

이래서 프란시스 베이컨은 이렇게 말했다.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어떤 길로 가기를 바라고 교육시키려면 부모들 자신이 먼저 그 길로 가야 한다.” 하지만 성경을 두루 살펴보아도 자녀교육에 그다지 성공한 경우는 흔치 않다. 사실 자녀문제 만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모세나 사무엘 등은 모두 출중한 인물이었지만 그 자녀들은 오히려 무능력자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다윗도 그 자녀 때문에 큰 곤욕을 치른 비극의 왕이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의 시조 아담 자체가 그 자녀로 인해 어려움을 당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정은 어떠했을까?

그들이야말로 근심도 걱정도 없이 자녀들을 키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적어도 우리 같은 고민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해 준다. 그들 부모도 우리와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도 근심이 있었다. 놀라기도 했다.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꾸지람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 부모 역시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부모였던 셈이다.

내용은 이렇다. 가족들이 예루살렘의 여행으로부터 집으로 돌아올 때의 일이었다. 부모 마리아와 요셉은 하루가 지나서야 예수가 그들과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사흘 후에 성전에서 찾아내었다. 그 사흘은 도시로부터 떠난 시간을 가리킨다. 즉 하룻길의 여행에서 자식을 잃어버린 것을 발견했고 되돌아가는데 이틀이 걸렸으며 예수를 발견한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주석가들은 당시의 여행 행로를 설명하므로 부모가 아이의 행적을 몰랐다는 것을 변명해 보려고 하지만 적어도 부모의 실수라고 여겨진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부모들 역시 우리처럼 약점과 실수를 저지른 부모였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마리아나 요셉 모두 완전한 부모들은 아니었다.

그뿐이 아니다. 부모들은 예수의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가 어려운 이야기를 했기 때문은 아니다. 적어도 부모들은 이미 잉태부터 탄생까지 기이한 일을 여러 번 목격해야 했다.

시므온의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는 찬송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기이히 여기더라”는 것이었다. 요셉은 이미 상식을 초월한 방법으로 그가 잉태되었으며 이미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완전히 이해된 것은 아니었음이 드러나는 구절이 있다. “깨닫지 못하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생명들은 불완전한 우리 부모들에게 맡기셨다. 이를 두고 진정한 은혜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송길원 목사/가족생태학자, 행복발전소 하이패밀리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