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CSI’ 도로교통조사연구관… 흔적조차 없어도 과학으로 역추적 ‘진실’ 가린다

입력 2011-11-13 19:30


13일 오전 11시쯤 서울 성내동 주택가 사거리에 도로교통공단 소속 교통조사연구원 2명이 나타났다. 형광색 점퍼에 녹색 모자를 쓴 왕재춘(46) 구장회(44) 연구원은 지난 9월 27일 마티즈와 SM5 차량 충돌사고가 벌어진 곳을 구석구석 살폈다.

당시 마티즈 운전자 최모(43·여)씨와 SM5 운전자 조모(59·여)씨는 사고가 경미해 보험사만 불렀다. 보험사 측은 ‘우측 차로 우선’ 원칙을 들어 동쪽에서 사거리로 진입하던 최씨에게 불리한 판정을 내렸다. 이에 최씨는 “내가 사거리에 먼저 진입했기 때문에 판정이 부당하다”며 사고 이틀 뒤 경찰에 신고했다.

조사에 나선 경찰은 사고 현장에 흔적이 거의 없어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고 교통조사연구원에 조사를 의뢰했다. 교통조사연구원은 애매한 교통사고 상황에서 과학적 분석을 통해 분쟁을 최소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른바 교통사고계의 과학수사대(CSI)다.

두 연구원은 줄자로 차간 거리와 사거리의 폭, 사거리 진입로에서 차까지의 거리 등을 면밀히 측정하며 사고 난 지 44일이 지난 현장을 차근차근 복원했다. 사고자 2명도 불러 각각의 주장을 30분 넘게 들었다.

오후 2시쯤 사무실로 돌아온 왕 연구원은 컴퓨터의 ‘PC-CRASH’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 분석에 나섰다. 차량 제원, 현장사진, 측정한 각종 수치 등을 입력하자 모니터에 충돌 모습이 그대로 구현됐다. 이후 1시간 동안 시속과 마찰력을 바꿔가며 사고 직전 상황을 역추적한 왕 연구원은 “마티즈가 사거리에 먼저 진입한 것은 맞지만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우측 차로 우선권에 의해 마티즈의 잘못이 조금 더 크다”고 결론 내렸다.

지난 5월 31일에는 서울 장위동의 한 어린이보호구역(시속 30㎞ 이내)에서 시내버스가 어린이를 친 사고가 발생했다. 버스운전사는 경찰에서 “30㎞ 미만으로 주행했는데 아이가 갑자기 뛰어들었다”고 주장했다. 판별에는 버스 내 CCTV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교통조사연구원이 CCTV에 찍힌 외부 모습과 실제 외부환경을 비교해 속도를 측정한 결과 버스의 평균 시속이 28㎞로 나온 것이다.

그나마 이런 사고는 처리하기 쉬운 편이다. 비나 눈으로 현장 흔적이 말끔히 지워진 경우엔 베테랑도 결과를 내놓기 어렵다. 연구원들은 “사고 직후 휴대전화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두는 것이 정확한 분석에 큰 도움이 된다”고 입을 모았다.

경찰뿐 아니라 검찰과 법원에서도 조사를 의뢰해 오지만 교통조사연구원은 현재 서울에 단 8명(전국 78명)뿐이다. 8명이 1년에 450∼500건의 사고를 처리한다. 2007년엔 ‘도로교통사고감정사’라는 공인자격증도 생겨 2000여명의 합격자가 배출됐지만 채용으로 잘 이어지지 않고 있다. 도로교통공단 관계자는 “증원이 시급한데 사기업이 아니어서 쉽지 않다”고 말했다.

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