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공열 (6) “가난한 집 장남과 왜 결혼?” “자신감에 반했죠”
입력 2011-11-13 17:27
우리 부부가 지난 4월 둘째아들 내외의 두 번째 손녀 출산으로 시카고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둘째며느리가 우리 부부를 시카고의 근사한 프랑스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뜬금없이 종업원이 케이크와 샴페인을 가져다주고 주변 사람들이 축하를 해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축하할 대상은 우리 둘째손녀인데 왜 나와 아내 주변에서 박수를 치느냐고 며느리에게 물었다. 그러자 며느리와 아내는 웃으면서 “오늘 4월 18일이 결혼기념일이에요”라고 알려줬다. 아내가 나와 동고동락을 한 지 벌써 38년임에도 정확한 결혼 날짜를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내심 미안한 마음에 그날 나는 아내를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내 아내 전영순 권사는 9남매의 막내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막내딸이었기에 장인어른에게 귀여움을 한몸에 받고 자랐다고 한다. 그러던 아내는 병든 시아버지와 소작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시어머니가 있는 집안으로 23세에 시집을 오게 된 것이다.
아내와 나는 같은 교회를 다녔음에도 서로 알지 못했다. 당시 아내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주일날 대예배만 드리고 있었고, 나는 청년부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이랬던 우리 사이를 이어준 것이 이병돈 목사님 일행과 함께 있었던 주길남 권사님이다. 권사님은 예배당에 들어오는 지금의 아내를 가리키며 내게 ‘저기 어머니와 함께 오는 자매가 어떠냐’고 물어왔다.
그때 본 아내 모습은 내 이상형에 가까웠다.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사업이 어려워 망설이던 내게 권사님은 아내를 소개해줬다.
아내를 처음 만난 날, 나는 그에게 내 모든 상황을 다 이야기했다. 나보다 세살 어린데다 좋은 환경에서 자란 아가씨가 시골 출신에 가진 것 없는 7남매의 맏이를 어떻게 볼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는 이런 내 배경을 싫다는 내색 없이 긍정적으로 이해해줬다. 아마도 가진 것 없는 나를 긍휼히 봐 준 게 아닌가 싶다. 이는 아내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처갓집 식구들의 반대에도 장모님은 가진 것 없는 나를 신앙이 좋다는 이유로 지지해 주셨다. 그렇게 우리는 짧은 연애를 하고 1973년 결혼식을 올렸다.
사업을 시작했지만 그때까지 이렇다 할 수주 없이 실패만을 거듭했기에 시장에서 파는 반지로 결혼 예물을 대신했다. 신접살림도 아내의 결혼 지참금으로 마련했다. 결혼한 이듬해 첫아들이 태어나고 그로부터 2년 후 둘째아들이 태어났지만 형편은 개선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아내의 고생은 시작됐다. 내가 수금을 못 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아내는 친정집에 가서 쌀을 얻어와 밥을 하곤 했다. 아내는 동생들의 어머니 역할도 했다. 결혼한 지 7년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린 동생들은 아내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아내는 나와 결혼했을까. 얼마 전 첫째가 뜬금없이 ‘가난한 집 맏이에게 왜 시집왔느냐’고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에게서 ‘첫 만남에서 내가 너무 자신에 차 있는 모습에 반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사람과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던 내가 아내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당장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이대로 놔두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