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위기에 보건 지출 줄어들고 성매매 늘고… 에이즈 확산, 더 암울한 그리스
입력 2011-11-12 00:28
그리스 수도 아테네에 사는 34세 주부는 지난달 병원에서 검진 결과를 통보받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검진 결과서는 자신과 두 살짜리 딸이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에 양성 반응이라고 판정했다. 딸은 모유 수유를 통해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주부는 임신 중 에이즈 검사 기회를 제공받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감염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에이즈 환자에게 금기시되는 모유 수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와 떨어져 살아 젖을 먹지 않은 쌍둥이 아들은 음성 판정을 받았다. 전문가들은 정부 차원에서 의무적으로 실시돼야 하는 검사가 왜 생략됐는지 의아해했다.
재정난에 허덕이는 그리스 정부가 임신 여성 검진 예산을 깎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렇지만 그리스 정부와 민간의 보건 관련 지출은 지난해 250억 유로에서 올해 160억 유로로 36%나 줄어들 전망이다. 더불어 암울한 사회 분위기 탓에 마약에 의존하는 사람은 크게 늘고 있다. 문제는 한번 사용한 마약 투입용 주사기를 돌려쓰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의 마약 투여자는 1인당 연간 주사기 3개를 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인당 연간 200개가 있어야 에이즈 감염을 막을 수 있다고 본다.
10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올해 1~5월 에이즈 판정을 받은 그리스인은 384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255명에 비해 약 50% 늘었다. 미국의 연평균 에이즈 환자 증가율 7%와 비교하면 엄청난 증가 속도다. 그리스의 에이즈 감염자는 인구의 약 0.1%인 약 1만1000명(2009년 기준)이다.
에이즈 감염자 증가는 사회안전망 파괴와 깊은 관련이 있다. 딸에게 감염시킨 주부 사례처럼 공공보건 체계에 구멍이 뚫린 것이 한 이유다. 정부기관인 헬레닉 질병통제예방센터는 산모를 통한 에이즈 감염은 2009년에만 여러 건이라고 털어놨다. 경제난에 따른 성매매 증가도 에이즈 확산의 원인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기존 에이즈 환자에 대한 관리다. 그리스 정부는 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치료제 비용으로 이들에게 1인당 매달 1000유로를 지원하고 있다. 최근엔 정부가 지원금을 600유로로 깎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 나머지는 감염자 본인이 부담해야 해 돈 없는 환자는 치료를 포기할 가능성이 있다.
에이즈 감염 경로에서 벌써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성 간 성관계나 주사기 돌려쓰기에 따른 감염이 늘고 있다. 지금까지는 동성 간 성관계가 원인인 경우가 비교적 많았다.
WHO 에이즈위원회 자문위원인 니코스 데데스는 “현 상황은 바람 부는 메마른 숲과 같다. 한번 불이 붙으면 무서운 속도로 에이즈가 번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2차 구제금융안 가결을 목표로 한 그리스 과도정부가 11일 출범했다. 루카스 파파데모스(64) 총리 지명자를 리더로 출범한 새 내각은 제1당인 사회당, 제1야당인 신민당 등 3당 인사들로 구성됐다. 유로존 등과 구제금융 협상을 주도한 에반겔로스 베니젤로스 재무장관은 유임됐다.
권기석 기자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