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평론 베스트셀러 작가 손철주·이주헌씨 대담 “동양화서 울림을, 서양화서 고요를 본다”
입력 2011-11-11 17:25
분야는 동양미술과 서양미술로 엇갈린다. 문체는 ‘흥이 넘치는 예인’과 ‘단정한 선생님’ 만큼 멀다. 한 출판평론가 말을 빌려 “막걸리 한잔한 것 같은 흥취”와 “어떤 순간에도 유지되는 성실함”이라 불러도 좋겠다. 둘은 그만큼 다르다. 그래도 따지자면, 다른 점보다는 공통점이 많다. ①일간지 미술담당 기자 출신에②미술 관련 학위가 없고③학고재(출판사와 갤러리)에서 일했으며, 결정적으로 둘 다 ④책 내면 무조건 사보는 고정 독자층을 거느린 스테디셀러 작가다.
1990년대 싹트기 시작한 예술대중서 시장에서 두 사람, 미술평론가 손철주(57·학고재 주간)와 이주헌(50·학고재 갤러리 전 관장)씨를 빼면 얘기는 싱거워진다.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1,2’ 등 30여종의 책을 낸 서양미술 분야의 독보적 저술가 이씨와 대중필자가 드문 동양화 분야에서 매력적인 감상 가이드로 각광받는 손씨. 지난 8일 서울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이씨는 ‘역사의 미술관’(문학동네)을, 손씨는 공저 ‘다, 그림이다’(이봄)를 막 낸 참이다. 서로의 글에 대해, 동양미술과 서양미술에 대해, 예술 감상에 대해 한담을 나눴다.
손철주(손)=(이 전 관장은) 계통 있는 수업을 받은 사람이다. 문체에서도 반듯하고 옆길로 새지 않으려는 자기통제, 선생님의 충실한 분위기 같은 게 드러난다. 나는 천방지축 독학이니까(웃음). 사승(師承)관계가 있을 리 없고 제멋대로다. 신명은 가득하지만.
이주헌(이)=책 읽고 미술 공부하는 과정은 나도 중구난방이었다. 학부에서 서양화를 전공해서(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의 시각이랄까, 배움이랄까. 그런 게 있을 뿐이다. (선생님 같은 문체는) 성격인 모양이다. 학문체계 밖에서 접근해간다는 측면에서는 (손 주간과) 비슷한데, 글에서 내 얘길 잘 안한다. 이주헌이라는 필자가 자기 얘기를 언제 하나 기다리는 독자는 실망할 것 같다(웃음). 좋게 보면 모범생 같고, 나쁘게 말하면 딱딱하고.
손=이 전 관장의 근작 몇 권을 읽어보면 글이 예전보다 아카데믹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 같다. 박람강기(博覽强記·널리 읽고 잘 기억함) 그런 게 느껴진다. 내공이 쌓인 자신감 같기도 하고. 이제 독자들을 체계와 계통이 있는 미술의 세계로 끌고 가겠다는 그런 의도인 듯도 하다. 나는 매일 내 흥에 겨워 울고 노래하는 쪽이니까 늘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내게 그림은 이렇게 쉬운데 남들은 어려워하니까, 도와주고 싶어서 글을 쓴다. 그래서 늘 글 쓰는 목표는 명료하게 전달하고 이해시키는 거다. 반면 손 주간은 개인의 내밀한 생각까지 드러낸다. 덕분에 독자는 필자와 사적으로 만나는 느낌을 갖는다. 저 사람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 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독서와 공부를 통해 힘들게 얻어낸 손 주간만의 어휘들은 글 읽는 맛을 느끼게 해준다. 나는 못 따라가는 부분이다.
손=이 전 관장은 사람 자체도 글처럼 반듯하다. 단아하고 전아한 유학자의 풍모 같은 거다. 옆길로 새도록 잡아끌어도 제 길을 걷는 사람이다. 그게 글에도 나타난다. 대중적 에세이스트로서 앞서서 길을 개척하면서 거둔 성과도 대단하고. 내 글의 독자가 있다면, 그 독자한테는 늘 미안한 마음이 있다. 날 따라오면 안되는데 그런(웃음).
(예술서 시장에서 동양미술과 서양미술 시장의 파이는 다르다. 한 출판 관계자가 “동양서 시장은 잘 쳐줘야 서양미술의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고 말할 만큼 두 분야의 격차는 크다. 저자들 역시 이런 불균형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고 했다.)
손=동양미술 강의를 나갔을 때 눈 반짝이고 듣는 사람은 대개 50∼70대 노인들이다. 청중이 50명이면 20∼30대는 10명 안쪽이다. 그나마 안 졸면 다행이고. 대중들이 서양미술에 편향돼있어 안타깝다. 동양미술에 대해 물을 때도 서양미술의 관점에서 끄집어낸 질문을 한다. 나무랄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젊은 세대의 취향이나 트렌드가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동양미술은) 고리타분하다, 싱겁다, 이런 평에는 반발심이 생긴다. 동양미술 안에 무한한 풍류와 깊은 인문적 요소가 있다. 그걸 모르면서 겉만 보고 말하니 아쉽다.
이=편향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서양미술에 대해 글을 쓰지만, 나도 동양미술의 엄청난 세계와 그 안의 떨림, 울림을 듣고 공감하는 사람이다. 전공자가 적은 것도 아닌데 우리 미술은 대중적 언어로, 정서적 토대 위에서 설득력 있게 해설해줄 사람이 (서양미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손 주간의 역할이 중요하다. ‘다, 그림이다’에서 우암 송시열의 초상화를 해설하면서 송시열을 ‘조선 후기의 이데올로그’라고 말했는데, 그게 옛날 인물을 현재로 확 잡아당겨 말하는 방식이다. 한국미술을 해설할 때는 이런 게 굉장히 중요하다.
손=서양화를 통해 동양미술을 말하려고 노력할 때가 있다. 좀 억지스럽지만 18세기 선비화가 이인상의 ‘와운(渦雲)’을 미국 추상화가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과 비교하는 식이다. 그렇게 동서양을 오가면 감각을 확장할 수 있다. ‘역사의 미술관’에서 (이 전 관장이) 소개한 19세기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의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같은 작품을 보면 모든 죽음은 고요하지 않나. 근데 그 고요 속에 울부짖음이 보인다. 울부짖는 고요랄까, 맹렬한 고요랄까. 그걸 보면서 갈대가 흔들리는 동양화를 떠올린다.
이=단순비유하자면 동양미술은 서정시, 서양미술은 서사시에 가깝다. 동양은 3인칭 혹은 초월적 시선, 서양은 인간중심 1인칭 시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동양미술은 함축적 깊이가 있는 반면, 서양미술은 산문적이다. 디테일하게 다 설명하고 한눈에 보여준다. 동양미술은 다 안 보여주니까 감상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우리 두 사람은) 이렇게 다른 문법을 가진 동서양 미술을 서로의 방식을 빌려 해설해주는 것이다. 손 주간은 서정시를 서사시로, 나는 서사시를 서정시로.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