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문자처럼 스러져가는 한 여자, 한 남자…
입력 2011-11-11 17:22
희랍어 시간/한강/문학동네
“이 소설은 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썼던 소설들 가운데 두 남녀가 나오는 이야기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먼저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서 시작하는 소설은 처음입니다. 그럼 사랑 이야기냐고 누군가 묻기에,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다만 한 여자와 한 남자의 기척이 만나는 이야기였으면 합니다. 침묵 속에서 방금 흘러나온 그들의 순간들, 그래서 아직 침묵이 굳거나 마르지 않은 순간들이 부디 문자로 옮겨졌으면 합니다.”
소설가 한강(41)이 지난 6월 초, 문학동네 웹진에 장편 ‘희랍어 시간’ 연재를 시작하면서 밝힌 글쓰기의 방향이다. 그가 2달 여 동안 일일연재라는 압박을 견뎌내고 연재를 마친 뒤 묶은 ‘희랍어 시간’(문학동네)은 그러니까 그 자신이 밝힌 대로 ‘침묵’과 ‘기척’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는 어떤 원인도 전조도 없이 말을 잃는다. 처음엔 열일곱 살 겨울이었다. “수천 개의 바늘로 짠 옷처럼 그녀를 가두며 찌르던 언어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녀는 분명히 두 귀로 언어를 들었지만, 두텁고 빽빽한 공기층 같은 침묵이 달팽이관과 두뇌 사이의 어딘가를 틀어막아주었다. 발음을 위해 쓰였던 혀와 입술, 단단히 연필을 쥔 손의 기억 역시 그 먹먹한 침묵에 싸여 더 이상 만져지지 않았다.”(15쪽)
말을 잃고 살던 그녀의 입술을 다시 달싹이게 한 건 그녀가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배운 ‘비브리오떼끄’라는 한 개의 프랑스 단어였다. 낯선 불어를 힘겹게 발음하는 그 순간에 대한 묘사는 이렇듯 빼어나게 아름답다. “철자와 음운, 헐거운 의미가 만나는 곳에 희열과 죄가 함께, 폭약의 심지처럼 타들어가고 있었다.”(17쪽)
시간은 흘러 이혼을 하고 아홉 살 난 아이의 양육권도 빼앗긴 후 또다시 말을 잃어버린 여자는 사설 아카데미에서 희랍어를 배운다. 사설 아카데미의 희랍어 강사는 가족들을 모두 독일에 두고 십수 년 만에 혼자 한국으로 돌아와 희랍어를 가르치지만 그가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독일에 있는 여동생에게 편지를 써 간간이 자신의 근황을 전한다.
“수업 시간에 지명하면 대답하지 않고, 휴식시간에도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아. 처음에는 그저 수줍어하는 성격의 여자라고만 생각했는데 반년이 지나도록 단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는 걸 깨닫자 이상한 생각이 들더구나.”(77쪽)
사실, 소설의 스토리 라인은 이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작가는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와 눈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남자는 강단 위에 켜 있는 환한 불빛 아래에서만 수강생들의 기척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그녀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다. 연필을 쥔 손에 힘을 준다. 고개를 더 수그린다. 단어들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입술을 잃은 단어들”(126쪽)이라는 표현은 남자의 흐릿한 시선에 포착된 여자의 모습이다. 이에 비해 “한 사람이 눈 속에 엎드려 있다. 목구멍에 눈(雪). 눈두덩에는 흙.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127쪽)라는 구절은 여자가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이다.
작가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란 결국 몸이나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처럼 미세한 기미와 기척을 통한 것임을 일깨운다. 그렇다면 왜 ‘희랍어 시간’인가.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플라톤이 구사한 희랍어는 마치 막 떨어지려 하는 단단한 열매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세대 이후 고대 희랍어는 급격하게 저물어갑니다. 언어와 함께 희랍 국가들 역시 쇠망을 맞게 되었지요.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언어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의 석양에 서 있었던 셈입니다.”(30쪽)
가장 오래된 언어라는 희랍어가 플라톤 시대에 정점을 찍고 몰락의 길을 걸었듯 말과 눈을 잃은 두 남녀 또한 그렇게 몰락해 간다는 것을 작가는 극도로 절제된 단어와 문장을 통해 들려주고 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