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의 딸 구하기’ 오길남- 윤이상 20년 진실 공방… 진실과 주장 사이 혼돈의 통영
입력 2011-11-10 18:09
경남 통영 출신의 세계적인 음악가를 기리는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는 지난 6일 일각의 비난 속에 폐막했다. 콩쿠르가 열리고 있던 지난 3일 시민단체 ‘대한민국대청소500만야전군’ 회원 100여명은 통영 강구안 문화마당에서 규탄집회를 열고 “윤이상은 ‘통영의 딸’을 북한의 생지옥으로 보낸 대가로 호강을 한 인신매매 간첩”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콩쿠르 사무국에는 “음악제를 당장 폐지하라”는 전화가 빗발쳤다. 이 콩쿠르가 통영사회를 이념적으로 갈라놓는 시빗거리가 된 것은 시작된 지 8년 만에 처음이다.
지난 8일 오후 3시에 찾아간 통영 도천동 윤이상 기념관. 관내 관람객은 세 명이었다. 70대 노인 6명이 기념관 마당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매일 이곳에서 친구들을 만난다는 김모(75)씨는 통영의 분위기에 대해 씁쓸하게 말했다. “외지인들이 내려와서 ‘윤이상이 간첩’이란 유인물을 뿌리며 하는 얘기 들으면 그 말이 맞는 것도 같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윤이상은 그래도 통영 출신의 자랑스러운 음악인인데, 뭘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윤이상의 행적에 대한 논란은 지난 8월 본격화된 통영의 딸 신숙자(69)씨 모녀 구출 운동에서 비롯됐다. 통영현대교회 방수열(49) 목사의 아내가 ‘에스더기도운동본부 집회’에 참석했다가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있는 신씨가 통영 출신이라는 얘기를 들은 게 계기였다. 처음 이 운동을 시작한 통영현대교회 측은 지난 5월 북한 정치범수용소 전시회를 열었고, 신씨의 남편인 오길남(69) 박사를 초청해 강연회를 열었다.
독일 브레멘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해 1985년 월북한 오 박사는 이듬해 아내와 두 딸을 북한에 둔 채 탈북했다. 주독 한국 대사관에 자수해 92년 한국 땅을 밟은 오 박사는 이후 북한연구소, 통일정책연구소, 국가안보통일정책연구소에서 국책연구원 등을 지내며 가족 구출 운동과 강연활동을 했다.
통영현대교회는 지난 8월 언론사 몇 곳에 통영의 딸을 구출하자는 전면 광고를 실었다. 윤이상이 오 박사에게 접근해 월북을 회유했고, 오 박사가 탈북한 후에는 가족사진과 육성 테이프를 전해주며 재월북하라고 협박했다는 내용도 실렸다. 이 광고를 계기로 오 박사의 사연이 여러 매체에 크게 보도됐다.
통영 지역사회의 갑작스런 분열
이 과정에서 통영시는 분열됐다. 통영현대교회와 보수 성향의 시민단체들이 통영의 딸 구출 우동을 벌이는 가운데 지난 8월 통영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통영의 딸은 당연히 구출돼야 하지만 오 박사의 검증되지 않은 주장이 사실로 둔갑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지역사회가 두 편으로 찢어진 이유는 당시 오 박사의 월북에 윤이상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놓고 진실 공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통영의 딸은 올 들어 처음 외부에 알려진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은 92년과 2003년에 ‘재독 동포 오길남 재망명 사건’과 ‘송두율 교수 사건’으로 이미 이슈가 된 바 있는 묵은 논쟁이다.
오 박사는 92년 5월 22일 입국 당시에도 공항에서 윤이상과 송두율 뮌스터대 교수가 월북을 협박했다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국가안전기획부는 윤이상과 송두율이 북한 공작조직과 깊이 관계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다음 날 윤이상과 송두율은 서독에서 반박 성명을 발표하고, 서독 교포들이 발행하는 월간지인 ‘한인회보’ 6월호에 반박문을 실었다. 국가안전기획부는 “억지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국내 일부 신문은 윤이상과 송두율의 반박문을 실었다.
“나는 그가 이북에 간 것을 모르고 있었으며…내가 이북에 영향력이 있고 동포 중 원로라서인지 오길남은 베를린 주재 이북 연락관을 찾아가 가족의 독일 귀환 가능성을 타진해 달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윤이상)
“이 사건 발표가 노리는 효과는 남쪽이 해체를 요구하는 범민련(해외본부의장 윤이상)을 약화시키고 그동안 국내의 학계와 독자를 위해 집필한 필자를 이들로부터 고립시키는 데 있다고 판단된다.” (송두율)
반면 오 박사는 93년 3월 ‘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자유문학사)라는 책을 발간하고 SBS TV ‘주병진 쇼’에 출연해 가족 귀환 운동을 벌였다. 오 박사는 이후 각종 인권단체에도 문을 두드렸지만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올해 2월 한동대 기독 동아리가 서울 인사동에서 주최한 ‘북한 정치범수용소-그곳에는 사랑이 없다’ 전시회를 통해 조금씩 관심을 받게 된다.
그의 저서도 세이지 출판사를 통해 지난 6월 제목을 바꿔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으로 재출간됐다. 이 저서를 보면 윤이상의 반박문과 일정 부분에서 일치하다가도 엇갈리는 대목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내가 울지 않자 아까보다 더욱더 화를 내었다. 윤이상은 아내와 애들을 눈 덮인 산속으로 끌고 가 찍은 흑백사진 여섯 장을 들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 ‘참 못생겼다.’ 그러자 (윤이상의 아내인) 이수자가 내쏘았다.…윤이상은 말했다. ‘당신은 도와줄 만한 가치가 없소. 나가시오.’ 나는 일어섰다.” (오길남의 저서)
“두 딸 아이의 애절한 목소리를 듣고도 태연하였다. 옆에서 눈물을 흘리는 내 아내의 모습에도 전혀 감각이 없었다. 그리고 가족사진을 보고 왜 아이들이 못났는가 하면서 히히적거렸다. 그리고 횡설수설하면서 가족에 대한 애절함은 표시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가족 찾는 것을 단념하였습니다’라고 잘라 말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호통을 쳤다.” (윤이상의 반박문)
2003년, 영구 미제
이 사건은 2003년 송두율 사건으로 다시 한 번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당시 검찰은 공소시효가 지났지만 사건을 재조사하기 위해 오 박사를 불러 월북 과정에서 송 교수의 역할을 추궁했다. 앞서 국가정보원도 송 교수와 오 박사의 대질신문을 벌였다. 검찰은 사전구속영장 신청 단계부터 오길남씨 입북 권유 혐의 등은 공소시효가 지나 범죄 사실에 포함시키지 않았고 더 이상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영구 미제 사건’으로 끝난 것이다.
그러나 조사 과정에서 국정원과 검찰, 송 교수의 주장은 엇갈렸다. 국정원은 송 교수가 탈북한 오 박사에게 “내가 오형이라면 북한에 다시 들어가겠다. 우리가 기댈 언덕은 북한밖에 없다”고 말한 부분을 시인했다고 그해 10월 1일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 업무보고에서 밝혔다. 그러나 송 교수는 “오씨와의 대질신문은 녹취됐으니 이를 들으면 진실이 드러날 것이다. 이 순간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입북을 권유한 적 없다”고 반박했다.
오 박사의 심경을 전하는 당시 언론 인터뷰 기사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오씨는 송 교수의 입북 권유 의혹에 대해서는 ‘송 교수는 원래 무슨 말이든 직접적으로 하지 않는 편’이라며 ‘다만 방향 제시 정도는 있었다’고 말끝을 흐렸다.” (동아일보 2003년 10월 2일자)
2011년, “아내 눈물 닦아 주고 싶다”
92년, 2003년에 이어 2011년에도 화제가 됐지만 윤이상 등의 월북 협박 여부는 그 진실이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다. 기자는 9일 오전 오 박사와 10여분간 전화 인터뷰를 했다.
-가족들이 송환되시길 바란다. 가족을 대면하면 어떨 것 같은가.
“만나면 (가족을) 부둥켜안고 울지 않겠나. 아내 눈물을 닦아 주고 싶다.”
-윤이상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1975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 주최로 유신독재 타도하고 민주사회 건설하자는 데모를 했다. 그때 윤이상씨가 나타났고, 시위가 있은 후 프랑크푸르트 모처에서 저녁 모임이 있었다. 그 다음 (만남이) 75년이었던 것 같은데 윤씨가 베를린 저택에 민건 회원들을 초대했다. 거기서 불고기도 먹었다.”
오 박사의 저서를 보면 민건 회원인 야채상 김종한씨가 오 박사를 차에 태우고 베를린 시가지를 달리다 숲에서 세운다. 이후 오 박사는 북한에서 온 ‘김 참사’와 ‘백 서기관’을 만나게 되고, 북한행을 놓고 고민할 때 윤이상이 이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기술돼 있다. 이후에도 김종한은 북측 인사와의 만남을 한 차례 더 주선한다.
-야채상 김종한씨와 연락이 닿나.
“김종한이라는 친구는 내가 요번 10월 말경에 베를린 가서 확인했는데 지금도 야채상 하고 있다. (김종한은) 칠십 두 살이다. 만나지는 못하고, 부인하고도 이혼을 했다고 들었다.”
-김씨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남겠다.
“김종한이가 (월북 권유) 했나? 윤이상하고 윤이상이 갖고 있는 공작단이 했지.”
-책에는 김종한씨가 가장 적극적으로 회유한 것으로 나오지 않나.
“뭐, 글 쓰다 보니까…. 어떨 때는 엉터리고 뭐 그렇겠지. 그걸 그대로 뭐 전부 다는 아니니까. 글마(김종한)도 만나고 다 했어요. 윤이상이도 하노버에서 만나고 송두율도 만나고.”
-이 책 내용은 모두 사실인가.
“그럼!”
-윤이상이 직접 회유, 협박했다는 증거가 있나.
“같이 통일 운동 하자고 권유했고, 통일 운동의 구체적인 것은 북한 가서 알아보고 일을 해봐야 되지 않느냐고. 증거 많지요.”
-목격자나 녹취록이 있다는 뜻인가.
“(윤이상이) 우리 가족 흑백사진 보여주고 테이프 레코드를 저한테 줬어요. 맨날 문제가 그거 아닙니까. 증거자료를 내놔라 하는 거. 나는 못 내놓습니다. 사진 6장과 테이프 레코드 있고요. 옛날에도 육하원칙에 의거해서 증거자료를 내놔라, 송두율 사건 있었을 때도 말이에요, 그런데 내가 내놓을 수가 없잖아요. 똑같은 거예요. 그런 물증을 내라 하면 나도 손을 들어요.”
통영현대교회 방수열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오 박사의 가족이 북한에 남아 고통을 당하는 것 이상의 큰 증거는 없을 것이다. 증거는 없더라도 오 박사의 저서를 보면 아주 구체적인데 이는 사실을 적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처자가 그곳에 있다는 게 가장 중요한 물증이다. 신숙자 모녀가 구출이 되면 모든 게 밝혀질 것이다.”
통영의 딸은 구출돼야 한다. 하지만…
독일에서 오 박사와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삼열(70) 한국기독교사회발전협회 이사장은 당시 상황을 알 수 있지 않을까. 1974∼82년 민건 회원으로 활동한 이 이사장을 전화 인터뷰했다.
저서에서 오 박사는 이삼열 전 숭실대 교수에게 북한 칠보산연락소 고문 이창균의 아내 오군임과의 대화를 전했으며 송두율 교수가 김일성의 은총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기술돼 있다. 오 박사가 탈북 후 독일에서 만났다는 이 이사장은 당시 만남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오 박사가 북한에서 경험한 것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송두율이가 김일성의 은총을 받았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또 윤이상이나 송두율이 북으로 가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없었다. 북으로 가면서, 간다는 말쯤은 (두 사람에게) 한 것 같다. 두 사람이 회유나 협박을 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안 믿는다. 송두율도, 윤이상도 아는데 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도 있고 그들이 북한에 드나들었다고 해서 앞잡이나 그럴 사람들은 아니라고 본다. 탈북하고 나서 오길남이 윤이상을 만난 것은 확실하고 가족사진 갖다 주고 그러는 과정에서 윤이상도 화를 냈던 것 같고, 오길남은 더 노력하지 않는 것에 대한 섭섭함이 있었던 것 같다. 오 박사와는 같이 민건 활동하면서 세미나도 하고 서울대 문리대 후배이기도 해서 꽤 친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는 1960년대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 등이 포함된 독일과 프랑스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조선 대사관 및 평양에서 간첩교육을 받고 대남적화활동을 했다고 밝혔다. 이른바 동백림 사건이다. 그러나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당시 정부가 국가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해 사건을 확대·과장했다고 밝히며 불법 연행과 가혹행위 등에 대해 사과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통영의 딸을 구출해야 한다는 데는 누구도 이견이 없다. 통영의 예술단체, 구출 운동을 주도하는 교회, 시민들도 하루빨리 송환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통영의 딸’이 돌아와야 한다는 당위성과는 별개로, 이들이 어떤 과정으로 북한에 가게 됐는지는 오길남 윤이상 송두율의 진술이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통영사회의 분열은 여기에서 비롯됐다. 일방의 주장 외 증거가 제시되지 않는 상황에서 누구의 주장을 더 신빙성 있게 받아들이느냐는 저마다 다르다. 그래서 이 문제는 앞으로도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통영=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