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공열 (5) 타지서 만난 고향 목사님 “좋은 처자가 있는데…”
입력 2011-11-10 00:41
내게는 육신의 부모 외에 또 다른 부모가 있다.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니기 위해 은산면에 매일 왕래하던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이익종 부면장 부부가 그분들이다. 교회를 가려면 부면장댁을 지나야 했는데 그때마다 그분들은 ‘몸이 아픈 아버지를 모시느라 고생한다’며 따뜻한 시선으로 안부를 묻곤 했다. 부면장은 우리집 경제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혹시 굶고 다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해주기도 했다. 그분은 내게 ‘공열이를 양아들 삼겠다’고 말해 농담처럼 받아들였는데 나중에 아버지께서 ‘부면장이 너를 양아들 삼겠다고 하더라’고 해 놀란 적도 있다. 이렇듯 부면장 내외는 내 처지를 걱정하며 친부모처럼 돌봤고 나도 이분들과 한 식구처럼 지냈다.
서울에서 사업을 시작할 때도 그분은 내게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부면장 부부가 틈틈이 내가 보낸 돈에 이자를 불리고 퇴직금까지 얹혀 사업자금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이 자금은 내가 사업을 시작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70년 나는 드디어 꿈꾸던 개인사업을 시작했다. 공간은 지인의 사무실을 함께 쓰기로 했지만 전화기가 문제였다. 당시만 해도 백색전화기는 전화권을 함께 구입해 사용했는데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되팔 수 있어 높은 가격에 팔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화 없이는 사업이 진행될 수 없기에 사업자금에 맞먹는 전화기를 구매했다. 그렇게 내 사업은 다른 사람의 사무실 한쪽에서 책상과 전화기 한 대를 전부로 조촐하게 시작됐다.
그러나 사업은 내가 꿈꾸던 만큼 장밋빛만은 아니었다. 납품을 했지만 수금을 못하는 일이 잦았고 수금했더라도 그 돈을 직원이 횡령하는 등 역경이 하나둘씩 몰려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업에 타격을 주는 일이 일어났다. 73년 당시 정부는 전력량 부족을 이유로 밤에 네온사인을 일절 켜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일반 가정도 오후 9시 이후는 불을 끄라고 할 정도였다. 옥외광고물 사업을 하는 나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들이 생기자 나는 주변 어른들 말씀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총각은 책임감이 없어 사업에 실패하기 쉽다.” 정말 그래서 안 되는가 싶어 결혼을 생각하게 됐다. 물론 이것만 갖고 결혼 결심을 한 것은 아니다.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생각뿐이었다. 사업을 할 당시 나는 서부성결교회에서 총각 집사이자 청년회장으로 매일 새벽예배를 드리고 전도 집회를 인도하는 등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고향 교회인 은산성결교회 이병돈 목사가 부흥집회 차 서부성결교회로 오셨다. 타지에서 고향 교회 목사님을 만난 나는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나섰다.
당시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아 목사님을 모시고 작은 중국요리집에 가서 식사를 함께 했다. 좋은 대접을 못해 드려 멋쩍은 마음에 목사님께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아이고, 목사님 제가 결혼을 했으면 집에서 모셨을 텐데, 결혼 안 해서 이런 집에서 모시게 됐네요. 죄송합니다.” 이 목사님 일행은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대답하셨다. “마침 우리에게 좋은 사람이 있는데….”
나는 이 말을 가볍게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일날 목사님 일행이 내 손을 잡고 누군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오는 처자가 우리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야!”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