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선교 100년] (10) 방효원 홍승한 선교사와 조력자들

입력 2011-11-10 21:05


고모부-아버지-아들, 代 이어 중국선교지 개척

취재팀이 9∼10월 세 차례, 총 17일간 중국 산둥(山東)성 일대와 미국 캘리포니아주를 샅샅이 훑은 결과 초기 한국 선교사들의 행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목사 등 1대 선교사들을 비롯해 조선예수교장로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의 발자취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곳곳에서 서서히 확인됐다.

취재팀은 라이양(萊陽) 지모(卽墨) 등지에서 1대 선교사들에 이어 사역했던 방효원 홍승한 선교사와 의사 김윤식 등의 행적을 따라가 보았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못한 사진을 찾아냈다. 방효원 선교사가 활동했던 스수이터우(石水頭)에서였다. 한 가정에서 방지일 목사 사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 사진 뒤편에 ‘1957년 8월 7일’이라고 써 있었다. 방지일 목사는 아버지 방효원 선교사에 이어 1937년부터 1957년까지 라이양과 칭다오(靑島) 등지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중국 정부로부터 추방조치를 당해 1957년 8월 23일 칭다오를 떠나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사진의 소유자인 75세의 노인은 “방 목사가 중국을 떠나기 전 그에게 남기고 갔다”고 밝혔다. 그를 통해 취재팀은 스수이터우, 다쾅 등 방효원 선교사가 사역했던 곳에서 지금도 중국인들이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스수이터우교회는 가정교회 형태였고, 다쾅교회는 정부의 허가를 받은 상태였다. 이 두 교회는 방효원 선교사가 세운 바로 그 교회는 아니었지만 어떤 정치적 격변과 이데올로기도 복음의 끈질긴 생명력을 잠재울 수 없다는 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방효원 홍승한 목사, 척박한 환경 속 선교사역

1917년 5월 박태로 목사와 함께 중국으로 갔던 방효원 목사는 박 목사가 병이 위중해져 귀국하면서 고립무원이 됐다. 이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중국어에 능통한 김병규 조사를 임시전도인 자격으로 급파했다. 방효원 목사는 김 조사의 도움을 받아 선교지를 돌본 뒤 1917년 8월 귀국, 선교사로 정식 파송을 받았다. 이때 홍승한 목사도 선교사로 파송돼 그해 9월 라이양에 도착했다. 홍 목사는 방효원 목사의 매제이자 방지일 목사의 고모부다. 김 조사는 1918년 2월까지 이들과 함께 선교활동을 이어갔다.

방효원 목사는 장녀 현길(11), 장남 지일(6) 1남1녀를 고국에 두고 선교지로 떠났다. 막내딸만 데리고 라이양으로 갔다. 두 자녀를 놓고 가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척박한 선교지에서 자녀교육을 하기란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그는 1917년 10월 라이양에서 계은승 사모와의 사이에서 차남 화일을 얻었다. 훗날 장남 지일은 산둥성 선교사가된 반면 화일은 상하이조선교회 목사로 시무했다. 방효원 목사는 이들 외에도 4남2녀를 더 두었다.

외국에서 자녀를 출산하고 키워야 하는 사모의 고충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주거문제, 교육, 의료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1913년부터 1916년 봄까지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목사 가정은 한 집에서 함께 기거했다. 1916년 봄 박 선교사가 몸이 아파 귀국한 뒤에는 두 선교사 가정이 한 집에서 살았으며, 1년여가 지나자 각자 사택을 마련할 수 있었다.

김영훈 목사는 1927년 7월 27일자 ‘기독신보’에서 초기 선교사들의 무단이탈 이유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당초 내가 철수한 본의는 선교가 불가능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전도국이 (선교사들이) 선교할 때 제반 시설을 마련해줘야 한다. 서양(선교사)과 같이 풍족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빈약한 가운데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그는 “철수에 앞서 선교 목적을 완수했고 (선교)토대 또한 구축했음을 확신했다”고 회고했다.

3명 선교사의 하차로 인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선교사 주거문제에 주목하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총회가 방효원 홍승한 선교사를 위해 1917년 12월 2000원을 지원해 라이양 남문 밖에서 사택을 매입할 수 있게 했다. 이때 선교사 사택으로 구입한 건물과 대지 평수는 800여 평에 와가(瓦家) 18간, 초가(草家) 6간 등 총 24간이었다. 선교기지 안에는 두 선교사 사택, 예배·전도장소로 사용할 수 있는 복음당(福音堂), 어학선생 방과 사환 방, 채소밭 등이 있었다. 총회는 1921년에는 3310원을 들여 방효원 선교사와 새롭게 파송된 박상순 선교사 사택을 건축하게 했다. 방효원 선교사는 1920년 안식년을 맞아 국내로 왔다가 전국교회를 순례하며 사택건축비 1431원41전을 모금하기도 했다.

방효원, 홍승한 선교사 가족을 위해 어학선생과 사환도 고용됐다. 이들은 언어공부와 잡무 처리에 도움을 줬다. 1917년 5월 1일부터 1918년 4월 30일까지의 자료를 보면 산둥선교 예산 가운데 어학선생 월급은 300원, 사환 월급은 100원이었다. 1918년 전도부는 총회에 두 선교사가 중국어를 잘 배워 전도를 잘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두 선교사는 중국어를 착실히 배우는 한편 라이양 외촌(外村)에서 적극적으로 전도했다. 그 결과 외촌에서 전도할 때 주민 100여명이 모여 두 선교사의 설교를 경청하기도 했다.

1918년 총회 전도부는 박상순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키로 한 뒤 어학선생 1명을 추가 고용하도록 했고, 어학선생과 사환 월급도 인상했다. 그해 총회는 전도국 규칙과 선교회규칙도 제정했다. 선교사 어학공부는 3년으로 하되 매년 한 차례 ‘시강(試講)’을 통해 평가하고 전도국에 보고하도록 했다. 선교사 부인들은 집안일 때문에 목사들처럼 어학공부에 전념할 수는 없었지만 교제 및 상담에 필요한 중국어를 배워 실전에 사용했다. 1919년 제8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전도부는 선교사 부인 중 방효원 목사 부인(계은승)의 중국어 실력이 최상이라고 밝혔다.

의사 김윤식, 선교사·현지인 진료하며 전도

초대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질병에 대처할 방도가 마땅치 않자 김영훈 목사는 1915년 총회에 의사를 보내줄 것을 정식 요청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박태로 선교사가 병이 심해져 1916년 봄에 귀국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선교지에서 의사는 꼭 필요했다. 의료와 질병에 손을 놓고 있는 상황에서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1918년 총회 파송으로 박상순 선교사 가족이 라이양으로 올 때 한 의사 가정이 동행한 것. 그는 세브란스 의전 출신의 김윤식이었다. 김씨는 라이양에서 개인 비용으로 셋집을 얻어 그해 12월 4일 ‘계림의원’을 개업했다. 계림의원은 당시 라이양에서 서양의학을 시술받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취재팀은 당시를 생각하며 현재 라이양의 최대 병원인 ‘라이양중심병원’을 찾아갔다. 김씨의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그때, 그 장소라는 걸 확인할 길이 없었다.

김씨가 라이양으로 처음 왔을 땐 방효원 선교사 가족이 질병으로 무척 고생하고 있었다. 방 선교사는 1918년 10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4개월 동안 병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계은승 사모와 한 아이는 독감으로 1개월간 고생했다. 두 아이 모두 40일간 홍역을 앓기도 했다. 계 사모는 아홉 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선교사들은 선교보고를 통해 김씨의 노고를 치하하며 총회 차원에서 감사의 뜻을 표시해야 한다고 요청하기도 했다. 김씨가 라이양에 온 건 총회 차원에서 이뤄진 게 아니었다. 자발적인 의료 사역이었던 것이다. 그는 선교사 가족과 현지인들을 치료해주는 한편 현지인들에게 신앙서적을 나눠주며 전도했다. 1919년에 총회 전도부는 김씨의 계림의원 매입비용으로 300원 예산을 요청하고 병원을 전도국 소유로 하려고 했다. 전도부의 청원은 평양 거주 성도 한 명이 비용을 전담하기로 해 가능케 했다. 병원사역에 대해 총회 차원에서의 관심을 넘어 동참이 이뤄진 것이다. 계림의원은 개업 때부터 조선장로회 선교병원으로 알려졌다. 서양선교사 가족들은 물론 현지 교회와 학교 구성원 모두는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총회 재정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선교병원으로 더 이상 활성화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라이양=글 함태경 기자·김교철 목사, 사진 서영희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