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드라마, 헷갈리는데…
입력 2011-11-10 17:37
세종이 논밭에서 똥지게를 지고, 걸핏하면 “개 엿 같은” “이런 우라질” “에라 빌어먹을” 등 쌍소리를 한다. 조선왕조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평가받는 임금의 언행으로는 뜻밖이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한석규가 맡은 세종의 캐릭터다. 한글창제를 두고 세종과 반대파가 벌이는 갈등과 음모를 스릴 있게 풀어내는 드라마의 내용은 어느 정도 사실일까.
◇세종의 성격은?=조선왕조실록 중 ‘세종실록’에는 세종의 품성이 참을성이 많고 침착하다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아버지인 태종은 화를 무척 많이 냈으나 세종은 거짓 보고를 하는 경우가 아니면 감정을 절제하는 스타일이었다. 굳이 욕을 할 경우라면 “용속(庸俗·평범하고 속됨)할 놈아!” “더벅머리 선비들아!”라고 했다.
드라마에서는 세종이 태종의 무력에 호위무사의 칼로 맞서려 했지만 역사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세종의 장인 심온이 죽임을 당한 다음날인 1418년 12월 24일 실록에는 “꿈자리가 사나웠다”라고 적혀 있다.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실장은 “세종은 32년의 재위기간 중 화를 낸 적이 스무 번도 안 될 정도로 심사숙고형”이라고 말했다.
◇밀본과 정기준의 실체는?=드라마는 ‘숨은 뿌리’를 뜻하는 ‘밀본(密本)’과 임금이 아닌 사대부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정도전의 유언을 담은 ‘밀본지서(密本之書)’의 미스터리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정도전은 밀본지서를 남기지 않았다. 다만 1394년에 편찬한 법전인 ‘조선경국전’을 통해 재상이 군주를 이끌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백정 가리온에서 밀본의 본원으로 정체가 드러난 정기준은 정도전 동생 정도광의 아들로 설정됐지만 가상인물이다. 정도전 동생은 정도존과 정도복으로 알려져 있으며 실록에는 1409년(태종 9년)에 정도복을 인녕부(仁寧府) 사윤(司尹·정3품 관원)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다. 드라마는 태종에 맞서다 죽은 정도전의 유언을 실행에 옮길 주역으로 정기준이라는 허구 인물을 내세운 것이다.
◇겸사복 강채윤은 누구?=겸사복(兼司僕)은 조선시대 왕의 신변보호를 위해 조직된 정예 친위병이다. 드라마에서 세종은 심온 집안 하인 출신의 어린 아이인 똘복(강채윤)을 살려내고 훗날 집현전 학사 살해사건 수사를 담당하는 겸사복으로 박탈했다. 강채윤은 부모를 죽인 원수가 세종이라고 여기고 복수를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본다.
세종과 함께 드라마의 중심 축을 이루는 강채윤 역시 가상 인물이다. 실록에 따르면 집현전 학사 가운데 채윤이라는 인물이 나오지만 별다른 기록이 없어 동일인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세종이 극비리에 진행한 한글창제 과정에서 일부 반대 목소리는 있었으나 집현전 학사가 잇따라 살해되는 등 밀본과 관련된 사건은 실록에 기록된 게 없다.
◇그 밖의 인물들=세종을 최측근에서 보필하는 나인 소이는 당시 궁중 법도상 있을 수 없는 설정이고, 세종의 호위무사인 무휼도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인물이다. 태종과 함께 정도전을 죽이는 데 가담한 민무휼이라는 인물은 있다. 집현전 학사 정인지 성삼문 백팽년, 좌의정 조말생, 영의정 황희 등은 실존 인물이지만 드라마에서 학자 출신 이미지와는 달라졌다.
역사적 사실과 허구가 혼동되는 사극은 자칫 시청자들로 하여금 전체 내용이 진짜인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한국사)는 “‘뿌리 깊은 나무’는 세종의 한글창제 업적을 흥미롭게 전한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엄연한 사실과 가상의 허구는 분명히 구분해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