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에 맞서는 어리석은 자… 그대는 오이디푸스
입력 2011-11-09 18:11
초등학생부터 노인에 이르는 모든 사람이 어떤 형태로든 한 번쯤 접해 봤을 고전 희곡이 무대에 올라가면, 집중되는 것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에 대한 관심이다. 아무리 비틀어봤자 원전에 충실한 작품보다 낫기 어렵고, 원전에 충실하면 그것대로 식상하다.
8일부터 27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재공연에 돌입한 국립극단의 ‘오이디푸스’(사진)는 원작의 미덕을 해치지 않으면서 세련되게 변형된, 외형과 주제의식 모두에서 보기 드문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가파르고 비스듬한, 삼각형 모양의 황량한 무대가 첫눈에 관객을 압도한다. 연출가는 의지와 지혜의 힘을 믿고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지만, 결국은 신의 뜻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아프게 그려냈다.
이야기의 큰 줄거리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을 타고난 오이디푸스의 불행이다. 한태숙 연출가는 신화에 기반한 이야기를 원형 그대로 따라가는 대신 등장인물들의 분위기를 현대적으로 변형하고 결말을 수정함으로써 관객에게 긴장감을 선사했다.
올 초 초연에 비해 쓸데없는 대사를 덜어낸 대본은 좀 더 간결해졌으면서도 흡인력을 키웠다. 무대 벽면에 매달린 시민들(코러스)도 2명 늘어나 시·청각적인 빈틈을 없앴다. 문학 외적인 측면에서도 세심한 변화가 제대로 기능했다. 짧은 무용 작품 한 편을 채우는 듯한 현대무용수 이경은의 움직임, 지극히 어두워진 가운데 순간순간 강렬하게 내리쬐는 조명, 고요히 절제된 가운데 절정을 향해 치닫는 음악 등등. 이 작품을 보기 드문 총체극으로 자리매김케 하는 요소가 군데군데 숨어 있다.
스스로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가 딸 안티고네와 방랑길에 나서는 결말은 자살로 바뀐다. 모든 관객에게 환영받기는 힘든 마무리임에 분명하나, 인간이 운명에 순응하는 존재인지 저항하는 존재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탄핵? 그 말이 나를 흔들지는 못 합니다. 나를 움직이는 것은 시민들이오” 같은 대사나 오이디푸스가 투신하는 마지막 장면은 정치적으로 읽히기도 했다.
이상직 정동환 박정자 차유경 정태화 등 출연. 티켓 가격은 2만∼5만원이다. 소포클레스 원작.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