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 희망의 나무를 심다… ‘희망고’ 국제NGO 인증 이광희 디자이너

입력 2011-11-09 20:22


지난 3일 만난 패션디자이너 이광희(59·이광희부띠끄) 대표는 국제 NGO 인증서(Certificate)를 흔들어 보이며 소녀처럼 기뻐했다. 사단법인 ‘희망고’가 남수단 정부가 인정하는 국제 NGO가 됐다는 증서였다. 등록일은 남수단 독립(2011년 7월 9일) 후 100일이 조금 지난 10월 24일이었다. 그는 남수단 정부로부터 1만평의 땅을 무상으로 받아 ‘희망고 빌리지’를 건설한다.

그는 상위 1%가 선호하는 옷을 만든다. 전·현직 영부인들이 그의 옷을 입었거나 입고 있다. 내로라하는 재벌가 안주인들, 재계·문화계 CEO들이 그의 고객이다. 그의 브랜드는 이미 대한민국의 럭셔리를 상징하는 대명사가 됐다. 그런 그가 세상의 가장 낮은 자들을 위해 ‘바늘’ 대신 ‘흙 삽’을 들었다.

바늘 대신 흙 삽

2009년 3월, 그 일은 운명처럼 시작됐다.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탤런트 김혜자 권사를 따라 20년 넘게 내전과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고통 받는 슬픔의 땅 수단의 톤즈를 방문했다.

톤즈는 한창 건기를 지나고 있었다. 가뜩이나 먹을 것이 없는 곳에 건기가 찾아오니 뙤약볕과 메마른 땅과 들판뿐이었다. 콜레라로 수백 명이 목숨을 잃고, 남은 주민들과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겐 굶주림밖에 없었다. 평소 눈물이 많은 그는 울지 않았다. 울 일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을 생각해내는 것이 먼저였다.

그는 ‘해남등대원’을 떠올렸다. 그의 부친은 1953년 전남 해남 땅끝마을에 ‘해남등대원’을 설립해 월드비전과 함께 50여년 동안 전쟁고아 수천 명을 돌본 고 이준묵 목사, 어머니는 평생을 남편과 함께하며 천진어린이집을 세운 고 김수덕 여사이다. 가정환경 탓이었을까. 그는 현장에서 ‘희망의 망고나무 심기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톤즈는 한국전쟁 이후 전쟁고아들이 많았던 해남의 땅끝마을 같았어요. 만약 저희 어머니가 이곳의 아이들을 보았다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니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나더군요.”

그는 유년시절 딸이 섭섭할 정도로 고아들을 먼저 돌보시던 모성을 이곳 아프리카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쇠잔한 삶은 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때야 깨달았다.

희망의 열매 망고

‘건기에도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있네?’ 시장에선 망고를 팔았다. 언제 열매가 열리는지 물었더니 1년에 두 번, 건기 때라고 했다. 망고는 심은 지 5년부터 100년 동안 해마다 두 번씩 열매를 맺으며 망고나무를 가진 것은 가게 하나를 가지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망고나무 몇 그루 덕분에 아이 셋을 키웠다는 한 과부의 이야기를 듣고 망고나무를 심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수중에 있는 돈을 털어 100그루의 묘목을 심었습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귀국해서는 국제구호단체 월드비전과 함께 대대적인 모금활동을 벌였다. 망고나무 한 그루 심는 데 드는 돈은 15달러 정도, 망고나무 한 그루면 한 어린이를 평생 지원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주변의 많은 분들이 참여했다. ‘혼자 힘닿는 데까지’ 하려고 시작한 일이 커져 버렸다. 2010년 3월, 사단법인 희망고를 설립했다. 희망고는 ‘희망의 망고나무’, ‘희망의 북소리’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남편 홍성태 한양대 교수가 지어준 이름이다.

92년부터 자선패션쇼를 펼치며 무의탁노인, 희귀병 환자 등을 도왔던 그는 ‘희망의 망고나무 심기 프로젝트’ 이후 자선패션쇼 등 크고 작은 행사를 더 자주 마련했다. 그동안 그는 3차례 톤즈를 방문해 3만 그루의 망고나무 묘목을 심었다. 이 일은 톤즈에 미리 나가 있던 월드비전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국제 NGO 등록

망고를 심고 열매를 맺기까지 5년이 걸린다. 그 기간 동안 톤즈 시내에 새로 사업장을 열어 여성들을 위한 기술교육과 어린이교육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역을 위해 희망고의 NGO등록이 필요했다. 이제 걸음마를 막 시작한 희망고가 국제 NGO가 될 수 있는지 여부는 하나님께 달려 있었다.

그는 지난 8월, 월드비전 구호팀과 톤즈를 방문해 톤즈 주지사와 군수를 몇 차례 만났다. 희망고 사역을 소개하며 NGO 허가를 요청했다. “마지막 미팅 전날, 내전 때문에 군수가 참석하지 못했어요. 전화위복이었죠. 제가 주지사 바로 옆에 앉아서 톤즈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고 싶다고 말했어요. ‘당신과 내가 시스터와 브러더라고 생각하고 돕는다면 가능하다’고 말하자 주지사는 좋다고 했어요. 결코 제가 한 일은 아니에요. 전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구호단체는 물론 개인에게 이런 큰 땅을 허가하기는 톤즈에서도 처음이었다. 물론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은 아니다. 지난 3년간 쌓아온 신뢰관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성주민들과 함께 옷도 만들고 그들만의 패션으로 완성된 ‘서머 톤즈룩’을 선보이는 즐거운 마을축제도 열었다. 트럭 짐칸 위에서 간이 패션쇼 무대를 만들고 한 명씩 화려한 의상과 액세서리 코디를 선보이고 푸짐한 음식을 나눴다. 지난해에 심은 망고 묘목의 상태도 관찰하고 묘목을 심어준 가정을 방문해 재배법을 알려주며 응원도 해주었다.

희망고 빌리지

할 일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희망고 빌리지’엔 여성들에게 전문적 기술을 가르치는 우먼스 트레이닝센터, 여성들이 교육을 받는 동안 자녀들을 돌봐주는 탁아소, 남성들에게 기술교육을 시켜주는 컬처센터,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위한 희망고 학교, 망고 묘목장을 세우기로 했다. 내년 7월이면 ‘희망고 빌리지’가 완공될 예정이다.

그는 축제같이 즐거운 기부문화를 꿈꾼다. 그래서 바자도 축체처럼 연다. 벤치마킹하러 오는 기업인들도 있다. “할머니가 아이 생일 때 ‘네 이름으로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망고나무 하나 심어줄게 너도 어른이 되면 망고나무를 심으렴’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아요. 백화점에 가면 제주 망고 하나가 2만5000원이에요. 그 망고 하나면 톤즈에 망고나무 한 그루를 심을 수 있답니다.”

그는 다음 달 6∼7일 서울 ‘이광희 부띠끄’에서 ‘희망고 빌리지 건립을 위한 바자’를 연다.

어머니의 무명한복

그의 어머니는 바느질 솜씨가 좋았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무명한복 두 벌로 지냈다. 딱 한 번, 말년에 버린 커튼을 다듬어 새 옷 한 벌 해 입은 게 가장 큰 호사였다.

“어머니가 가신 길과 너무나 다른 길을 걸었지만 어머니는 그런 저도 장하다고 하셨어요. 무슨 일을 하든 혼을 박아서 하라고 하셨고 전 최선을 다했어요. 사실 희망고 사역이 너무 힘들어 후회도 했지만 하얀 무명한복을 입고 아이들을 돌보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버텼어요.”

그는 86년 서울 남산에 ‘이광희 부띠끄’를 내고 평생 옷만 만들었다. 클래식 공연장이었던 호암아트홀, 국립극장, 예술의 전당에서도 패션쇼를 처음으로 개최했다. 홍콩의 아시아위크지는 그를 ‘한국 최고의 여성복 디자이너’로 꼽았다.

믿음의 헤리티지

그의 일상은 화려해 보이는 직업과 다른 점이 많았다. 말수도 적고 낯도 많이 가린다. 주로 납작한 검정 운동화를 신고 작업하며, 그가 즐기는 복장은 후드 재킷에 트레이닝복이다. 또 그는 운전을 할 줄 모르고 컴퓨터를 켜는 방법도 모른다. 후원자들과 감사 문자를 주고받기 위해 최근에야 휴대전화 문자 보내는 법을 배웠다. 몇 년 전까지 옷 만드는 것이 인생의 전부였던 그에게 이젠 희망고일이 반 이상을 차지한다. 또 이 일로 살맛이 난다고 했다.

“부모님에게 신앙은 실천이라고 배웠습니다. 부모님이 평생 사랑해온 사람들을 이제 제가 사랑하려고요. 슬픔대륙 어딘가에서 굶주리고 있는 한 아이를 위해 오늘도 희망을 심습니다. 전 함께 꿈꿀 수 있어 행복합니다.”

글 이지현 기자·사진 김태형 선임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