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음악 이야기] 찬송가의 변천
입력 2011-11-09 18:20
지금까지 우리의 찬송가를 정리해 보면 고대에서 현대까지, 지역적으로는 기독교가 전파된 거의 모든 지역의 노래를 수록하고 있다는데, 역사적으로 성경과 찬송가는 뗄 수 없는 관계를 지속해 왔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말씀이지만 찬송은 영감에 의해 가사와 곡이 붙은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다. 종교 개혁기를 중심으로 찬송가의 변천과 특색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히브리 음악은 예술적 용도보다는 기능적 용도로 사용되었고, 작곡됐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즉흥적으로 만들어졌다. 출애굽기 15장 20절을 보면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기악과 성악을 함께 사용하고 춤추는 것도 예배의 형태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다윗왕 때에 처음으로 큰 규모의 관현악단이 조직되었고 전문적으로 이 분야를 담당하며 가르치도록 레위족에게 임무를 주었다. 솔로몬 시대엔 성전예배 음악이 확실하게 자리 잡혀 갔으며, 성전에 봉사하던 자들 중에 예배를 위하여 3만8000명의 레위인이 선발되었고, 그중 4000명이 성가대를 했다(역대상 23장 3∼5절).
둘째, 중세의 찬송가는 시편에 바탕을 둔 찬송가다. 유대교의 예배 의식에서는 시편이 응송과 교송의 두 형식에 의해서 가창되었는데 이는 모두 기독교 예배에 채택되었고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셋째, 종교 개혁기인 16세기에 루터를 중심으로 일어난 종교개혁은 그동안 성가대가 라틴어로 노래했던 성가에서 충분한 음악 훈련을 받지 못한 일반 교인들도 부를 수 있도록 쉽게 했고 또한 자기 나라말로 부를 수 있게 했다.
마지막으로, 종교개혁 이후 17세기에는 유럽의 음악이 독일로 옮겨졌다. 특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1685∼1750)의 창작 중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 음악의 성장은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 전철을 밟은 여러 가지 종교 활동의 결과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내에서 일어난 복음주의 부흥과 그 뒤에 일어난 낭만주의 운동에서 종교적 감정은 주로 찬송가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찬송 못지않게 예배시에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파도 많아지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음악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바흐는 칸타타와 코랄로 교회음악에 크게 공헌하였는데 그 후의 어떤 종교 음악에서도 볼 수 없는 정열과 설득력, 투철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으로 성서와 기독교를 설명하고 있다.
헨델(George Fridercick Handel·1685∼1759)은 오라토리오로 교회에 공헌하였는데, 오라토리오는 칸타타와 비슷한 내용이었다. 오라토리오는 본디 이탈리아어로 가톨릭성당에서 ‘기도소(祈禱所)’를 뜻했으나 16세기 기도소의 집회에서 사용한 음악이 계기가 돼 특정한 음악형식을 가리키게 되었다. 오라토리오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나 종교적 내용의 이야기를 극화하여 교회나 음악회장에서 연주하는 대규모 악곡을 말한다. 독창, 합창, 관현악으로 연주되고 레시타티브(recitative 서창), 아리아(aria), 합창으로 음악이 구성돼 있는 것은 오페라에서와 같다. 그러나 독창보다 합창이 중시되며 음악은 극적이지만 연기, 무대배경, 의상, 분장을 사용하지 않는 점과 내용이 주로 세속적인 오페라와 다르다.
칸타타는 이탈리아어의 ‘cantare(노래하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보통 독창(아리아와 레치타티보)·중창·합창으로 이루어졌으나 독창만의 칸타타도 있고 또 처음에 기악의 서곡이 붙어 있는 것도 적지 않다. 그리고 가사의 내용에 따라 세속(실내)칸타타와 교회칸타타로 구분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찬송가의 가사와 선율을 바탕으로 한 코랄칸타타이다. 칸타타는 이후에도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프로코피예프, 베베른에 의해 작곡되었으나 칸타타의 전성기는 바흐와 더불어 막을 내렸다 해도 무방하다.
김기원(관동대음악학부교수, (사)기원오페라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