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있는 교회-제주시 한경면 조수교회] 교회당 십자가 위에 가을 바람이 걸렸네!
입력 2011-11-09 18:03
제주도의 가을은 바람에서부터 느껴진다. 섬 둘레 바다에서 시작됐는지, 섬 가운데 한라산에서 시작됐는지 바람이 섬 전체를 휘감으며 가을의 풍경을 만들고 이야기를 만든다. 바람을 따라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눈을 감고 가만히 바람을 느낀다. 가을의 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고개 들어 하늘을 올려본다. 파란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 새파랗다. 멀리 바다를 내다본다. 하늘과 경쟁하듯 쪽빛으로 빛난다. 이제 주변을 둘러본다. 은색인지 금색인지 모를 물결이 바람에 일렁인다. 만개한 억새꽃이 천지를 뒤덮고 장관을 연출한다. 다시 바람을 느껴본다. 싱그러운 내음에 취한다. 제주도의 가을은 정녕 아름답다. 한 교회가 제주도의 가을만큼이나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다. 제주시 한경면 조수리 311번지 조수교회(064-733-0928). 140여명의 교인이 예수 안에서 사랑하고 섬기고 교제하면서 풍성한 생명을 나누는 공동체다.
제주도는 사시사철 아름답다. 봄에는 유채꽃을 비롯해 벚꽃, 철쭉 등이 어우러져 꽃잔치를 벌이고, 여름에는 곳곳의 아름다운 해변에서 청정바다를 즐길 수 있다. 겨울에는 눈 덮인 한라산의 설경이 그만이다. 그럼 가을은? 눈이 시리게 청명한 하늘, 마음까지 물들게 할 것 같은 쪽빛 바다, 탁 트인 조망에 성큼 다가와 선 한라산, 단풍으로 물들어 봉곳봉곳 솟은 오름들…. 가을의 제주도는 아름다움 그 자체다.
제주도는 지금 그 가을의 절정을 구가하고 있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따사로운 햇살 속 선선한 바람이 멋들어진 가을의 풍광을 만들어내고 있다. 공항 주변 여기저기 서 있는 야자수의 이국적 정취까지 있다.
공항을 벗어나 조수교회를 찾아 나선다. 제주시내를 거쳐 중문 쪽으로 방향을 잡아 산간도로로 접어들자 금세 제주도만의 특색이 눈에 든다. 다양한 모습의 돌하르방, 구멍이 숭숭 뚫린 까만색 돌들, 노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밀감밭 등이 연이어 보인다. 조금 더 가자 왼쪽으로 크고 작은 오름들을 앞세우고 웅장한 자태가 나타난다. 평소 같으면 희미하게 보일 한라산이 맑은 날씨 때문에 선명하게 보인다. 곳곳에 내걸린 세계 7대 경관 투표를 독려하는 현수막, 방어축제 올레축제 등을 홍보하는 글귀 등이 여행의 분위기를 더 돋운다.
얼마나 갔을까, 애월읍을 알리는 팻말을 지나고부터 색다른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여행객을 환영하듯 억새꽃이 길가 양쪽에 도열해 있다. 간간이 군락을 이뤄 들판이나 오름 주변을 뒤덮고 있기도 하다. 조물주가 빚어낸 비경이다.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어 차에서 내려본다. 솜털처럼 부드러운 꽃이 애잔하다.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로 시작되는 옛 가요가 떠오르며 묘한 감상이 일어난다. 척박한 땅에서 비바람과 찬 서리를 견디면서 꿋꿋이 생명력을 이어가는 제주 사람들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가던 길을 이어가자 갑자기 역한 냄새가 코에 진동한다. 성이시돌 목장이다. 1960년대 초반 가난에 시달리던 제주 사람들을 위해 시작한 축산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아름다운 사연을 안고 있는 곳이라 생각하니 역했던 냄새가 오히려 향기로 느껴진다. 목장을 지나 조금 가니 ‘조수1리’라는 팻말이 보인다. 조수교회가 가까워진 것 같다.
조수교회는 아름답다. 조수리 마을을 관통하는 큰길가에서 살짝 들어간 곳에 교회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앉아 있다. 고운 잔디가 깔린 마당과 주변 경관이 교회당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바위 위에 자라는 나무와 식물, 소담스레 가을꽃들을 피운 화단 등은 누군가가 잘 가꾸어 놓은 듯하다. 잔디마당에 서 있는 두 그루의 큰 팽나무는 교회의 80여년 역사를 말해준다.
그냥 아름답다고 느꼈던 교회당을 자세히 보니 색다르다. 건물 형태도 그렇지만 여느 교회당에서 볼 수 없는 장식들이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눈치를 챘는지 김정기(60) 목사가 얼른 “중세의 기독교 건축 양식을 반영해 지었다”고 전해준다. 김 목사가 직접 디자인해 설계를 맡겼단다. 그러고 보니 성공회나 가톨릭 풍이 좀 느껴진다.
식당 겸용의 교육관이 본당과 사택을 교량처럼 연결하고 있다. 공연이나 영화 상영뿐 아니라 세미나까지 할 수 있는 문화홀로 쓰인다고 한다. 이곳에선 매년 2월 제자훈련 캠프를 연다. 사택도 김 목사 가족의 거처만으로 쓰이지 않는다. 2층은 문화센터 겸 갤러리로 활용되고 있다. 화가이기도 한 김 목사가 지역의 어린이들에게 미술을, 음악을 전공한 김선자(57) 사모가 바이올린과 첼로를 가르치는 교실이기도 하다.
잔디마당에는 두 개의 자그마한 골문이 서 있다. 꼬마들의 놀이터로 쓰이고 있다는 말이다. 때로는 문화마당이 되기도 한다. 지난 9월 바로 이곳에서 ‘조수 비엔날레’라는 이름으로 음악회와 그림 전시회가 열렸다. 인도 북부 히말라야 산간의 시킴족 마을에 학교와 교회를 지어주기 위해 마련된 이 행사는 2009년에 이어 두 번째로 열렸다. 김 목사는 “교회 앞 땅을 좀 구입해 결혼식과 다양한 행사를 열 수 있는 ‘조수문화마당’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김 목사의 안내로 들어선 교회당 안은 깔끔하면서 푸근하다. 250여석의 교회당은 해뜰 때와 해질 무렵의 햇빛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 천장의 구조에서부터 특이하다. 전면의 은은한 형광 불빛을 띤 십자가와 우주를 상징하는 코스모스 문양 또한 색달라 보인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교회의 역사를 나타내는 사진물들이 차례로 걸려 있다. “단순하면서도 예전(禮典)에 충실하려는 디자인을 했다”는 김 목사의 설명이다.
김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특이한 목회자라는 느낌을 받는다. 무엇보다 그는 꽤 알려진 화가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한 그는 서울산업대(지금의 서울과기대) 디자인학과를 다니면서 회화에 몰두했다. 그의 학력도 보통이 아니다. 장신대를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를, 컨콜디아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탠퍼드대학에서 한국학까지 공부했다. 이런 저런 상황을 볼 때 시골에 박혀 있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에 대한 그의 입장은 명쾌하다. 성공을 위해 하나님께 부름 받지 않고 섬김을 위해 부름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중앙보다 변두리를 지향하셨다”면서 “나 또한 목회자가 되면서 일찌감치 시골의 빈 곳을 찾았다”고 말한다. 결국 제주도는 그의 소신과 비전을 충족시킨 곳이다.
김 목사는 1990년 요양 차 제주도에 왔다가 비어 있던 납읍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됐다. 50여명 교인의 교회로 키운 뒤 96년 예장 통합 제주노회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2003년 다시 제주도로 돌아온 그는 조수교회를 맡았다. 조수교회 또한 이전까지 교역자의 빈번한 이동으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다 김 목사 부임 이후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1932년 자생적으로 세워진 조수교회는 4·3사건 때 소각되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6·25전쟁 때 모슬포 피란 성도들에 의해 다시 문을 연 뒤 70년 벽돌로 다시 지어졌다가 김 목사에 의해 2008년 지금의 모습으로 건축됐다.
김 목사는 이제 제주도 사람보다 제주도를 더 사랑하고 제주도를 더 깊이 안다. 그는 자신의 목회 인생을 제주도에서 마무리할 생각을 갖고 있다. 그는 지금 히말라야 산간지역 선교와 함께 제주도에서 제대로 된 영성훈련 캠프와 중증장애인 재활 터전을 마련할 꿈을 키우고 있다.
이제 교회를 떠나야 할 시간. 올 때처럼 바람이 등을 떠미는 대로 길을 잡아본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가볼 만한 곳이 널려 있다. 인근에 제주현대미술관과 저지예술인마을, 분재예술원 등이 있다. 위로 협재해수욕장 금릉해수욕장, 아래로 중문단지가 있다.
마침내 뉘엿뉘엿 해가 바닷속으로 잠겨든다. 바다가 석양으로 붉게 물든다. 석양 속에서 흔들리는 억새꽃 물결도 금빛으로 변한다. 짧은 여정을 줄곧 함께한 제주도의
바람이 공항까지 따라와 발길을 붙잡는다.
신앙 선배들이 걸었던 길을 걷자! 김정기 목사, 제주기독순례길 추진
제주도에는 의외로 복음의 흔적들이 많다. 조수교회 김정기 목사는 이 점에 착안, 제주기독교순례길을 만들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코스를 구상하고 있다. 그는 “제주도 기독교 신앙의 역사를 반추하면서 신앙 선배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 걷는다면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며 “일반인들에게 올레길이 인기를 얻듯 순례길이 기독교인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 목사가 추진하는 첫 번째 코스는 1908년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에 처음 복음을 전한 뒤 계속된 제주 선교 1세기의 현장을 체험하는 길로 구성된다. 즉 이 목사가 조봉호 선생 등과 함께 첫 예배를 드렸던 제주시 애월읍 금성교회를 출발, 서쪽 해안길을 따라 걸어 조수교회에서 마무리하는 23.5㎞다.
먼저 제주 4·3사건의 비극 속에서 순교한 제주 출신 첫 목사인 이도종 목사의 생가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 옥사한 조 선생 생가에서 그들의 강직한 정신과 신앙을 떠올린다. 이어 한림교회 협재교회 한경교회 등 제주도 곳곳에서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작고 소박한 교회들을 만난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창조 섭리를 묵상하고, 힘들게 살아온 제주 사람들의 삶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김 목사는 첫 번째 순례길이 만들어지면 조수교회에서 아래쪽 중산간지대를 통과해 모슬포교회까지 가는 두 번째 코스를 만들 계획이다. 여기에는 평화박물관, 이도종 목사 순교지, 대정교회, 강병대교회 등이 들어 있다. 그는 “순례길이 성장에만 급급했던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사색과 영성을 키우면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제주=글 정수익 선임기자·사진 강민석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