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의 고향] 크로스웨이성경연구원 원장 박종구 목사의 순천

입력 2011-11-09 20:49


순교 신앙과 청백리 정신이 합류…

순천만은 내 믿음과 문학의 젖줄


세계 5대 연안습지로써 흑두루미를 비롯한 희귀 철새 도래지인 순천만이 나의 고향이다. 한사리 때를 제외하고는 노상 촉촉한 맨살로 누워 있는 광활한 갯벌(22㎢)은 넉넉한 어머니의 품이다. 대대포구를 중심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는 갈대밭(5㎢)은 압권이다.

나는 이곳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갯벌소년이었다. 그래서 순천만은 내 문학의 토양이요, 사유의 공간이며, 신앙의 밑절미가 되었다. 다음은 나의 시 ‘아들’의 전문이다.

‘어머니는 밤바다의 큰 울음을 마냥

이르셨다

오늘도

바다로 내모시는 매운

어머니-‘

순천만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몬다위에 자리한 대대(大垈)교회가 나의 모교회다. 당시는 그 지역의 유일한 교회로 조동진 목사의 선친 조연성 장로께서 시무하셨다. 독립운동가인 그분의 가르침은 엄격했다. 철저한 십일조와 주일성수, 경건한 예배, 성경 읽기, 민족사랑은 거부할 수 없는 율법이었다. 설립 82주년이 된 대대교회는 현재 공학섭 목사가 섬기고 있다. 그는 정통개혁신학의 바탕에서 바른 목회철학을 펼치려는 투명한 목회자다. 공 목사는 대대교회에서 30여명의 목회자가 배출됐다고 한다.

나는 수동 울밑마을에서 걸어서 두어 시간 걸리는 도사초등학교에 다녔다. 2003년도에 나의 ‘산새 들새’ 동요비가 모교 정원에 세워졌다. 6년간 줄곧 반장과 학년 석차 1등, 그리고 5학년 때와 6학년 때 두 차례의 전남도지사상 수상을 높이 평가한 듯하다. 초등학교 시절의 모범생이라는 상표 때문에 나의 삶은 늘 모범적이어야 한다는 스스로의 다짐이 또 하나의 무거운 율법이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은 주로 시청 옆 장천동과 시내 중심가 남내동에 있었다. 교육과 종교, 그리고 문화의 심장부에 도전한 것이다.

순천은 일찍이 1905년에 보성 무만동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13년 미남장로교 선교부가 매산 등을 중심으로 학원선교와 의료선교를 활발하게 펼쳤다. 현재 430여 교회로 30%의 복음화율을 나타내고 있다.

순천노회 손양원 목사와 그의 두 아들 동인군과 동신군의 순교신앙은 나를 이끄는 신비로운 빛이었다. 고교시절 소풍 때 또는 친구들과 자주 애양원(당시는 애양원교회와 손양원 목사와 그의 두 아들 묘소가 있었다)을 찾곤 했다. 그 무렵 손양원 목사의 순교전기 ‘사랑의 원자탄’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서울에 올라와 총신대생이 된 후 ‘사랑의 원자탄’의 저자 안용준 목사 지도로 문서 사역을 시작했고, 마침내 ‘사랑의 원자탄’을 내가 경영하는 신망애출판사에서 발행하기도 했다. 93년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이 애양원에 건립될 때 ‘순교자’ 시를 헌증했고, 그 시는 오석에 새겨 기념관 앞에 세우게 됐다.

나의 고향 순천은 청백리의 고을이다. 고려 충렬왕(1275∼1308) 때 최석(崔碩)이라는 태수(지방관)가 이 고을에 부임해 왔다가 전임하게 되었다. 백성들은 전례에 따라 말 여덟 마리를 바쳤는데, 얼마 후 최석은 그 말 여덟 마리와 그동안 낳은 망아지까지 아홉 마리를 돌려보내 왔다. 그 후부터 태수가 떠날 때 말을 바치는 폐단이 근절되었다. 백성들은 최석의 갸륵한 뜻을 기리기 위해 ‘팔마비(八馬碑)’를 세웠다. 나는 ‘팔마비’ 앞을 매일 지나다시피 하면서 최석의 청렴결백한 공직윤리를 우러러보았다. 죽도봉에는 ‘팔마탑’이 우뚝 세워졌다. 죽도봉 역시 내가 매일 오르던 동산이었다. 죽도봉에 오르면 봉화산, 매산, 남산을 거느린 시가지가 평화롭게 앉아 있고, 동천과 옥천이 합류하는 두물머리가 죽도봉 발치다. 여기서 합류한 강물은 유유히 순천만에 이른다. 나는 손양원 목사의 순교신앙의 흐름과 최석의 청렴결백의 흐름이 내면에서 합류하여 육화되기를 소망했다.

나는 고2 때 오순택과 함께 시화전을 열었다. 전시 장소는 다방이었다. 눈 내리는 겨울 무거운 책가방을 든 여학생들이 줄지어 다방 문을 밀치고 들어서는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무렵 사상계 신인문학상으로 데뷔한 시인 허의녕 선생과, 순고에 재직 중이던 시인 문병란 선생의 찬조작품도 전시되었다. 전시 마지막 날 저녁 간담회 사회는 그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생명연습’으로 당선된 김승옥 선배가 맡았다.

인구 28만의 순천은 변하고 있다. 거대한 연향·금당지구 신도시가 형성되었고, 광양과 여천의 산업단지 영향으로 산업화 도시풍경으로 바뀌고 있다. 순천만은 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철새 도래지, 청정 갯벌 보호지역, 자연생태학습지로써의 위상에 맞게 개발되어가고 있으며, 관람자 300만명을 예상하는 2013년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한 지도 어언 반세기가 가까워 온다. 바라기는 나의 고향 순천이 산업과 예술이 조화롭게 발전하는 미래도시가 되기를 기대한다. 특히 순천기독교성지화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추진돼 평양과 전주 그리고 순천으로 이어지는 선교의 대간이 우람하기를 소망한다.

이렇듯 나는 고향을 떠나왔지만, 고향은 마냥 나를 놓아 주지 않는다.

박종구 목사

1941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10대를 고향에서 보낸 뒤 줄곧 서울에서 살고 있다. 시인이며 칼럼니스트인 그는 미국 훼이스신대원(Th. M.)과 웨스턴신대원(D. Miss.)에서 선교신학을 연구했다. 현재 월간목회 발행인과 신망애출판사 대표, 크로스웨이성경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주어를 바꾸면 미래가 보인다’ 등 20여권의 저서가 있다.

정리=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