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공열 (4) 최저임금 수준의 첫 직장… 그러나 꿈·신앙만은

입력 2011-11-09 00:41


첫 직장 ‘태양네온사’는 옥외 광고물을 취급하는 회사였다. 당시 나는 정규 직원이 되기까지 약 1년간 월급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서울에 올라올 때 가져온 지참금을 쓰면서 직장생활을 해야 했다. 1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월급을 받았는데 최저 임금 수준이었다. 월급만으론 생활이 안 됐기에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길거리 네온사인을 고쳐주면서 따로 돈을 벌어야 했다.

7남매의 맏이로 가족을 부양했던 나는 적은 돈이지만 월급의 대부분을 부여에 계시는 부모님께 송금했다. 그 당시엔 십일조를 생각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부모님께서 돈 받으시면 거기에서 떼겠지’라며 스스로 합리화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때만 해도 신앙엔 변함이 없었다. 타지에 나왔지만 생활방식은 변하지 않아 술이나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당시엔 서부성결교회를 다녔었는데 공장기숙사 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매일 새벽예배에 가곤 했다.

2년 후 나는 동종업계에서 더 큰 규모로 사업을 하는 ‘국도네온사’로 이직했다. 이전 직장의 월급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나는 개인사업체를 운영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최대한 많은 것을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를 위해 나는 동료나 상사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남들보다 체구도 작고 나이도 어렸지만 내게 맡겨진 일을 충직하게 해 나갔다.

나는 상사가 일을 지시할 때 단순히 시키는 일만 하지 않았다. 일을 할 때 효율성을 따져봐서 개선할 사항이 있는지 늘 고민했다. 나는 그렇게 얻은 아이디어를 사장에게 제안해 실제 제품에 반영토록 하는 등 적극적으로 업무에 임했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았는지 나는 동료들 가운데 가장 높은 급여를 받게 됐다.

사소한 오해(?)로 회사의 신뢰를 얻은 일도 있었다. 당시 회사는 호남정유(현 GS칼텍스)에 폴 사인을 수주해 직원들에게 현장에서 시공을 감리토록 했다. 전국 각지의 호남정유 주유소 가운데 직원들에게 가장 인기 없던 출장지는 호남이었다. 고속도로도 없는데다 경남지역에 비해 낙후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히려 호남지역 출장을 가겠다고 자원했다. 이 때문에 동기와 선배들은 성실하다면서 나를 칭찬했다. 사실 나는 고향이 부여였기에 출장 시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 선택한 것인데 말이다.

서울 상경 이후 고향집은 내게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직장에 취업하고 개인사업이란 목표를 위해 열심히 뛰어왔기에 힘든 일도 잘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가족들이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가족을 만나러 첫 직장생활 도중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것도 잠시, 나는 다시 직장으로 복귀했다. 어머니와 어린 동생이 가족을 부양하도록 놔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오래하진 않았다. 당시 나는 사업만이 가난을 지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총각이 사업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며 말렸지만 나는 틈틈이 모아둔 종자돈으로 1970년 직장을 그만두고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