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쪼개 詩語로 근원적 슬픔·열정 표출… ‘슬픔치약 거울크림’ 낸 시인 김혜순
입력 2011-11-08 17:57
김혜순(56) 시인의 열 번째 시집 ‘슬픔치약 거울크림’(문학과지성사)은 최근 통권 400호를 찍은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401호로 출간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제16회 대산문학상 수상 시집 ‘당신의 첫’ 이후 3년 만에 낸 이번 시집은 언어라는 난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흔들리는 한 척의 선박을 연상시킨다. 그 선박에 실린 단어들은 멀미를 하고 헛구역질을 하는데 ‘문지 401호’라 명명할 수 있는 그 배의 선장이 김혜순인 것이다.
“11월에는 잠이 오지 않았고/ 11월에는 천장의 별이 모두 켜졌고/ 11월에는 가슴이 환해 눈을 감을 수 없었고/ (중략)/ 우는 산산이고, 울은 조각이고/ 우는 풍비이고, 울은 박산이고/ 내 살갗은 겨우 맞춰놓은 직소퍼즐처럼 금이 갔네/ 우는 옛날에 하고, 울은 간날에 울었네/ 우는 비누를 먹고, 울은 빨래가 되었네/ 나는 젖은 빨래 목도리를 토성처럼 둘렀네”(‘우가 울에게’ 부분)
11월의 멜랑콜리에 관해 쓴 이 시에서 단어들은 스스로 뒤집어지고 엎어진다. 우리는 여기서 스스로 멀미를 하는 단어들의 표정들을 만나게 된다. 김혜순의 시어들은 기존의 의미망을 파괴하면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그것은 시인 자신이 기존의 지배적인 상징질서들이 만들어놓은 시적인 것들과 결별한 채, 단어들을 자신만의 회로 속에 빨아들인 뒤 구역질하듯 게워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시집에 실린 44편의 시들은 이렇듯 멀미와 헛구역질의 단어들로 채워져 있다. “걸어가면서 잠자는 거대한 회색곰처럼/ 눈꺼풀 위에 너덜거리는 거대한 검은 레이스 구름처럼/ 기름 질질 싸고 가는 사막 한가운데 덤프트럭처럼/ 계단은 썩고 다락은 먼지가 한 길이나 쌓인 집채처럼/ 덩그러니 나 말고 아무도 없다는 거/ 거리에서 쫓겨나고 쫓겨나면서/ 점점 커진다는 거/ 내가 세상의 비명으로 꽉 차 있다는 거”(‘어미곰이 불개미 떼 드시는 방법’ 부분)
그는 스스로를 ‘걸어가면서 잠자는 거대한 회색곰’에 비유하면서 언어의 망망대해를 혼자서 헤쳐 가는 지독한 몽상가이자 단독자로서 항해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표제 속 ‘슬픔’과 ‘거울’도 눈여겨볼만한 단어인데, 입구도 출구도 없는 방의 거울 앞에서 자신의 근원적인 슬픔과 열정을 되새김질하는 나날들은 이렇게 표출된다.
“나는 신성하게도 방사능이 타고 있는 벽난로 속에/ 숲처럼 까만 영혼을 던지고 쉬기로 했다/ 먼 나라에 왔으니 기억을 씻어야지 생각했다/ 조금 쉬다가 슬픔치약을 발라 이를 닦았다/ (중략)/ 빗이 거울을 부르고 거울이 빛을 부르고 빛이 나를 부르고/ 나는 방에 갇혀 있는 거울에 갇혀 있는 나의 슬픈 눈동자에 갇혀 있는/ 나에게 거울크림을 바르고 천천히 지워져 갔다”(‘창문 열린 그 시집’ 부분)
우리들이 일상에 느끼는 칙칙한 감수성을 단박에 무너뜨리는 묵직하면서도 도발적인 상상력과 이미지는 35쪽에 달하는 장시(長詩) ‘맨홀 인류’에서 정점을 찍는다. “비오는 날의 수챗구멍 속으로 내가 빨려 들어간다/ (중략)/ ‘나’, 내가 내 몸 속에 유폐되어 있는 곳을 부르는 이름!/ ‘나’, 몸속의 구멍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자들을 통칭하여 부르는 이름!/ ‘나’, 혹은 몸 속에 사시는 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분을 모셔 부르는 이름!”(‘맨홀 인류’ 부분)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