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공열 (3) 주일학교 사랑 독차지에 10리 교회 길을 단숨에…
입력 2011-11-08 00:41
어린시절 가정 일과 공부를 병행해야 했던 내게 교회는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매일 새벽에 드리는 가정예배로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을 외우고 있던 나는 주일학교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곤 했다. 추석이나 성탄절에는 아버지께 배운 찬양으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연극을 했다. 지금도 내가 주연을 맡았던 연극을 기억한다. 제목이 ‘삼천리 금수강산’으로 교회에서 선보였을 때 사람들이 참 좋아해 여러 번 공연했다. 이렇듯 형·누나들이나 선생님에게 칭찬 받는 게 좋았던 나는 10리길이나 떨어진 교회를 즐겁게 다녔다.
중등부 예배 때 교사들만 할 수 있는 대표기도를 자처하고 나설 만큼 교회에선 적극적인 학생이었지만 실제 성격은 내성적이고 소심한 측면이 더 많았다. 어른들 앞에서 인사를 잘 못하는 것은 물론 행여 여학생이라도 지나가면 얼굴이 빨개졌다. 겁도 많았다. 당시 면소재지에 있는 교회에 가기 위해 옆 동네인 가죽리를 거쳐야 했는데 종종 그 마을 아이들이 싸움을 걸어오곤 했다. 그래서 이들을 피하느라 교회 갈 때마다 2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시골의 칠흑 같은 어둠도 나를 두렵게 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고등학생 때까지 매주 금요일 저녁에 아버지와 함께 구역예배를 다녔는데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산과 개울을 넘어 다녔다. 어둠 속에서 어림짐작해 길을 찾다보니 때론 미끄러져 눈구덩이에 파묻히기도 하고 물웅덩이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사고를 당하면서도 계속 구역예배를 드렸던 것은 아버지와 함께했기 때문이다. 산기도를 다녀오신 후 치유은사를 받았던 아버지와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신앙에 담대함이 생겼던 것이다.
내가 중·고교 시절에도 아버지는 집사의 직분으로 교회와 기도원을 개척하고 기도로 치료하는 일을 계속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병이 나은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했다. 그러한 인연으로 만난 사람 가운데 이강천 목사가 있다. 당시 학생이었던 그는 아버지의 기도로 건강을 회복해 다시 학업을 지속하게 됐다. 이에 고마움을 느낀 이 목사의 작은아버지는 내게 서울행을 권했다. 시골에서 힘겹게 일하며 공부하지 말고 서울에서 일하며 포부를 펼쳐보라는 것이었다. 당시 17살이었던 나는 그의 배려에 감사한 마음만 갖고 회사가 무슨 일을 하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제기동 성동역 근처에 있는 옥외광고물 회사. 그곳이 나의 첫 직장이 됐다. 이곳에서 나는 네온사인 광고물을 제작했다. 살 집이 따로 없어 작업현장에서 일도 하고 주거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양쪽 집 사이 공간 추녀 밑에 양철로 만들어진 회사 건물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웠다. 심지어 겨울엔 이불이 얼고 물이 안 나와 얼음을 녹여 세수해야 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됐다. 타지생활이 힘들고 일은 고됐지만 신앙으로 인내하며 최선을 다해 일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쉽게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첫 직장에서 배운 옥외광고물 사업을 계속해 왔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딱히 적성에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게 맡겨진 일은 충실히 한다는 생각 때문에 계속 한 우물을 파게 된 것이다. 인내로 다져진 책임감과 열정은 훗날 목사님들이 내게 대형 연합사업을 맡기게 된 밑거름이 됐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